이상호 기자 유죄판결에 대한 문화연대 입장
이상호 기자의 “도청 내용 공개가 언론의 공적 사명에 기한 것이라서 사회상규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려면(1심)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한 원칙에 기한 평가를 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결국 재판부는 이상호의 ‘안기부 X파일’ 보도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한 원칙”으로 제한해야 할 ‘사회상규’를 위반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상호 기자가 한 행위는 결코 자신의 이기심이나 자신이 속한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의 부패에 대해 알아야 되고, 권력의 범죄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시민의 보편적 권리·사회의 알 권리를 위한 이타적 행위였다. 한국사회 최고 권력인 삼성, 일반의 접근이 사실상 차단된 최상의 재벌이 범죄를 모의하는 현장을 담은 내용을 보도한 것이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한 원칙”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사회상규에 위반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행위가 사회상규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인정받을 언론의 공적 사명이라는 말인가?
재판부의 판결문은 오늘날 한국의 법조계가 일반의 상식적 감각, 보편적 정서로부터 얼마나 멀리, 높이 떨어져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재판부는 “X파일 보도내용이 국가 안보나 사회질서 수호 등을 위해 부득이하게 보도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고 평가하기엔 부족하다”고 밝혔다. 대체 그 ‘평가’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신자유주의 자본이 지배하는 2006년 한국사회의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제대로 뿌리 두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수십 년 지난 상투적이고 구태의연한 보수주의,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수구주의를 반영하는 것인가? 재판부에 묻는다.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적 정치체제, 합법적 선거과정을 금권으로 혼란케 하는 조직적 범죄 집단에 관해 보도하는 것이 어찌 ‘부득이’하지 않은 것인가? 정치인을 매수하고 사법부를 매수하고 언론인을 매수하고, 전 사회를 통제하고자 하는 한국 최대 재벌의 음흉한 음모를 담은 테이프를 공개적인 매체를 통해 보도하는 것이 어찌 “국가 안보나 사회질서 수호”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재판부는 아직까지도 국가안보, 사회질서가 오직 외부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낡은 냉전주의에 빠져 있는가? 한국사회의 노동자, 농민, 학자, 시민과 더불어 호흡하는 생활자라면 결코 재판부의 그런 안일한 판단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재판부는 “실명까지 공개해 당사자 인격권을 침해한 점도 수단의 상당성이라는 척도에서 크게 일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도의 긴급성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1심에서처럼 “위법성을 쉽게 조각한다면 어느 순간 어느 권력이나 세력들이 보임직, 먹음직한 독과실을 얻고자 타인의 밀실을 엿듣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고한 타인의 밀실을 엿듣고 싶은 유혹에 빠진 미친·나쁜 권력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이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부정한 권력의 위법성은 정확하게 법적으로 응징되어야 하며, 밀실의 사생활을 침해받은 개인은 충분하게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와 이 기자 유죄의 판결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상호 기자가 재벌의 밀실을 엿보기라도 했나? 우리 보통사람들이 그런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나?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체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권력에 대해, 그게 무엇이든 정확하게 재판하라. 그렇지만 이 기자의 알려야 할 의무, 우리의 알 권리, 그리하여 가능한 사회의 판단할 권리를 맘대로 빼앗아갈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재판부가 밝힌 “당시 보도에 참여한 대한민국 모든 언론매체의 보도·출판 행위가 통신비밀 보호법 위반의 유죄임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게 2006년 한국의 법원이 언론매체에 대해, 그리고 양심적인 소수의 언론 매체와 언론인들을 통해서만 권력의 비리, 권력의 부패, 권력의 범죄를 간파할 수 있는 시민에 대해 ‘선언’하는 것인가? 통신비밀 보호법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한국의 검찰과 법원은 힘없는 시민의 통신비밀을 재벌과 국가의 양대 권력으로부터 제대로 지켜주고자 얼마나 노력했던가? 국가와 재벌이 자행해 온 온갖 통신비밀 보호법 위반의 행위가 유죄임을 선언한 적 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보호코자 최선을 다한 적 있었던가? 이 기자에게 징역 6개월, 자격정지 1년을 결정해놓고 사정을 ’참작‘해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 것은 이상호 기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정말 그렇게 통비법이 중요하다면 차라리 이 기자를 중형에 처하라. 늘 말하는 ‘법의 엄정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이번 재판부 결정은 단순히 이 기자에게 뿐만 아니라, 민주언론/언론민주를 상식으로 믿는 우리 시민 모두와 한국사회 전체를 모독하는 것임을 법원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상식에 어긋난 법원칙이라면, 이제 시민의 힘으로 바꾸어야 함을 이번 판결이 또다시 말해준다.
11월 24일 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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