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몽학(夢鶴) 이명하(李命夏) 선생
ㅇ 장 소 : 근대민족운동관 내
ㅇ 내 용 : 전 동포가 단결하여 일제에 맞서 싸우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대한독립단 경고문 등 다수의 공적사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개항 이후 위정척사론을 견지하던 유인석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가 제천군 주사로 봉직하며 국민 계몽을 위해 근대학교를 세워 교육계몽운동을 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과감히 관직을 박차고 나와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유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하여 민족의 기를 드높였다. 나아가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907년 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전을 전개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후 전국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재기를 촉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투쟁을 계속하던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나아가 국내에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처단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제의 소위 ‘경신대토벌’ 작전으로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자 중국 단둥(安東)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재차 무장투쟁을 준비 중 일본영사관 경찰들과 격전을 벌여 일경들을 처단하였으나 일본영사관과 평북경찰부 소속 경찰대의 추격을 받았고, 1921년 3월 3일 일본경찰대의 습격으로 선생을 비롯한 15인의 독립군 용사들이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웹사이트: http://www.i815.or.kr
연락처
독립기념관 기획조정실 홍보팀 양원길 041)560-0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