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호국인물’ 고경명 의병장
고경명 의병장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1552년(명종 7년) 사마시(司馬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공조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순창군수 등 관직을 두루 거친 후 59세인 1591년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두 아들 종후(從厚), 인후(仁厚)와 함께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고경명 의병장은 1592년 6월 1일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하면서 강력한 의병의 기세로 왜군의 남하를 저지했으며, 왜군이 금산과 전주를 경유해 호남을 침략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금산에서 왜군을 격멸할 것을 결의했다.
7월 10일 금산에 도착한 그는 곽영(郭嶸)이 이끌던 관군과 합세하여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하고 적의 본진을 선제공격했으나 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일시 물러났다. 이때 왜군이 전력이 열세인 관군을 먼저 집중공격했고, 싸울 것을 포기한 관군이 퇴각하자 기세가 등등해진 왜군의 공격에 의병군 진영도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자 고경명 의병장은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장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이라며 물밀듯 밀려오는 왜군에 맞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함께 장렬히 순국했다.
고경명 의병장이 순국한 후, 큰아들 종후가 또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이 전라좌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이 적기의병군을 일으켰으니 모두 고경명 의병장 휘하의 의병들이었다.
시·서·화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제봉집(霽峰集)』, 무등산 기행문인『서석록(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정기록(正氣錄)』등이 있다. 후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2월 7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후손을 비롯한 종중과 유관단체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경명 의병장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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