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도 의원, “승자가 독식하는 세상을 바꿔야 희망 있다”
그 공통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승자가 되어야 산다! 패자가 되면 죽는다!”
인간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경쟁에서 이긴 승자가 단맛을 독식하고, 패자는 쓴맛만 봐야 한다면 과연 그런 사회에 참다운 희망이 있을까? 오로지 선택받은 승자가 되기 위한 투쟁을 하며 인간의 역사를 핏빛으로 쓰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핏빛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칭기즈칸과 히틀러, 그 두 사람의 차이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짚을 필요가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 두 사람 모두 평화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침략자들이었지만, 그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히틀러는 장황하게 설명할 것도 없이 희대의 학살자로 패자들에게 잔혹한 죽음과 끔직한 비극을 안겼을 뿐이다. 그 대가로 그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에 칭기즈칸은 정복한 땅의 사람들, 패배를 인정한 그들에게 삶의 길을 열어 주었다. 오만한 정복자로 억압을 하기보다는 패자들이 최대한 자율적으로 살 수 있도록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칭기즈칸은 정복당한 이들의 협력을 받으며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흔히들 인간의 경쟁 사회를 두고 ‘적자생존’이니 ‘정글의 법칙’이니 하는 말들을 자주 입에 올리는데, 칭기즈칸과 히틀러의 차이만 봐도 그런 말들을 야만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승자가 되면 살고, 패자가 되면 죽는다?
앞서 언급한 정치권의 ‘줄 서기’ 혹은 ‘줄 세우기’를 보자. 국민에게 보이기 부끄러워 우리의 정치 현실을 감출 것은 없다.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감춘다고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여와 야를 가릴 것 없이 지금 ‘줄 서기’는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혼란에 빠져 있는 다른 당들보다 현재 대선 예비 후보들이 확실하게 등장해 있는 한나라당이 좀 더 뜨거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우리 정치권 전체의 문제이다.
대선 예비 후보가 있으면, 그를 중심으로 ‘캠프’라는 것이 차려진다. 그 캠프로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구의원, 자치단체장 등 정치권 인사들이 찾아온다. 이른바 ‘줄 서기’를 하는 것이다. 캠프의 ‘줄 세우기’에 이끌려온 이들도 있다.
이런 현상 자체를 이상하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정책이나 정치적 목적의 관점에서 어느 예비 후보를 지지하고 함께 움직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 현실은 그런 것만이 아니다. 특히 국회의원들이나 당직자들이 직분을 버리고 특정 캠프의 핵심 멤버로 줄줄이 참여하는 것은 어딘지 바람직스럽지 않게 보인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 정책 제시 등은 당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당이 분열된 것 같은 모습까지 연출하며(실제로 분열된 당도 있다.) 예비 후보 중심, 인물 중심으로 사분오열된다면 당의 정체성을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이며, 온갖 문제들을 끌어안은 채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왜 이런 식으로 ‘줄 서기와 줄 세우기’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비 후보의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에? 예비 후보와 정치적 목적이 같기 때문에? 원론적으로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줄 서기와 줄 세우기’에 나선 많은 정치가들이 그런 뜻을 갖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그러나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솔직한 국회의원들이 고백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공천권과 자리’의 문제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예비 후보가 승리해서 권력을 잡게 되면 다음 선거에서 공천과 자리를 받기 쉽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어렵게 되는 것이 지금껏 보아 온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그래서 승자가 되면 살고 패자가 되면 죽는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면 우리 정치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 살기에 바쁜 정치가가 누구에게 무슨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예비 후보들 가운데 누가 승자가 될지는 공정한 경선 방법에 따라 당원과 국민들이 선택하면 된다. 또한 선택이 끝난 후에는 당을 중심으로 승자와 패자가 함께 사는 길을 찾으면 된다. 그래야 당도 희망을 키울 수 있고, 국민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양극화’의 문제도 같은 방법으로 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승자와 패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우리 사회가 찾아야 한다.
정보화, 세계화로 특징지어지는 요즘 사회에서 정보와 자본을 쥐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창출하고, 승자가 되어 그 단맛을 독식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부를 창출할 정보도, 자본도 없는 다수의 사람들은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점점 어렵게 된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다고 도도하게 흐르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도 없고, 거스른다고 생존을 위한 그 어떤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대 문명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면서 새로운 희망의 문법을 찾느냐 하는 점이다.
‘양극화’를 놓고 말하면 결론적으로 국가가 나서서 새로운 문명의 특징과 문제점을 직시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승자와 패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국가보장제도’를 새롭게 세우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과거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 하였지만, 이제는 강자를 위해서도 ‘국가보장제도’는 필요하다. 다수의 약자를 보호하지 않으면 소수의 강자도 ‘양극화’로 인한 문제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후보가 훌륭한 ‘국가보장제도’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후 그 제도를 정착시킨다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나라에 희망을 준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부터, 공약을 만들고, 실제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승자가 독식하는 세상을 바꿔야 희망 있다.’는 화두를 품고 실천한다면 그런 역사적인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더불어 살기를 바라는 한 국회의원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질까? 새로운 생명의 계절!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나라당의 가능성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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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1일 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