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 2007년 8월 학위수여식 8월 24일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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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2007-08-22 15:53
광주--(뉴스와이어)--조선대학교(총장 김주훈)는 2007년 8월 학위수여식을 8월 24일(금) 오전 10시 30분 서석홀 4층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이번 학위수여식에서는 학사 474명과 석사 182명(대학원 76명, 교육대학원 61명, 산업대학원 14명, 보건대학원 19명, 경영대학원 5명, 정책대학원 1명, 디자인대학원 6명), 박사 76명 등 총 732명이 학위를 받고 사회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며 박태상 조선대학설립동지회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박태상 이사장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지역민의 성금에 의해 조선대학교가 태동하던 당시 정치학과 재학생으로 모금 운동에 적극 앞장섰고 졸업 후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5.16군사 쿠데타로 해직되면서부터 조선대학교 민주화 투쟁의 대장정에 나서 한평생을 헌신해 왔다.

이 자리에서는 유근영(대학원 식품영양학과 석사), 신상문(대학원 기계공학과 석사), 공현장(대학원 전자계산학과 박사), 김영섭(대학원 광응용공학과 박사), 송경래(디자인대학원 공예디자인 석사)씨 등 5명이 학술상을 받는다.

학위수여식은 김성준 교무연구처장의 학사보고, 김주훈 총장 치사, 김용채 이사장·이원구 총동창회장 축사, 학위수여, 상장 수여, 교가제창 순으로 진행된다.

□ 박태상 명예정치학박사 공적조서

사단법인 조선대학설립동지회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의송(毅松) 박태상 선생은 조선대학 전문부 2회 정치학과와 학부 정치학과 4회 출신이나 8·15직전 일본 동경 유학에서 귀국하여 1957년 9월 대학으로 진학할 때 까지 고향인 광양에서 한학을 전공했던 인연으로 역사의 원전탐독을 하였기 때문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강의했으며 1960년 교수직 해직후 불우시절에는 한시(漢詩)를 지어 울분을 소화하였습니다.

34세 때 교수직을 중도 하차하였는데 1960년 조선대학교의 분규사태 때는 문리대 정인보 교수의 주장에 찬성하였으나 박철웅 총장과의 개인적 정분과 대학의 민주적 개혁의 대의에 괴리가 생겨 고민하던 중 공사양전(公私兩全)을 위하여 3번 박총장을 심방하여 이사장직은 유지하고 총장직 사퇴와 족별체제의 이사진 개편을 건의하였으나 거부되어 20여명의 교수가 해직되고 21명의 학생들이 퇴교처분 될 때 함께 해직되었던 것입니다.

박태상 선생은 당시 문학과 교수로 함께 해임된 한춘홍(韓湷洪)교수와 더불어 학원민주화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1. 조선대학 학원민주화운동의 전기

21명 학생의 퇴교와 20여명 교수들의 퇴진은 학생시위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때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근무 중이던 추진수 교수는 조선대학의 개혁 교수단에 호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해직교수 중 재단의 이사를 겸임하고 있었던 김윤영(金侖泳) 전학장의 명의로 이사직무집행정지 및 임시이사임명 가처분신청을 추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하여 제소하였으나 패소하고 말았으니 개혁교수단의 첫번째 패배인 것이었습니다.

2. 5·16혁명과 개혁세력의 수난

1961년 5월 16일 5·16혁명을 계기로 조선대학의 박총장 중심의 족벌체제는 개혁교수단이나 학생세력을 좌파세력으로 오해하고 이를 반격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이 주효하여 해직교수 8명과 제적학생 10여명은 계엄당국에 예비검속되어 철저한 사상검증을 받았으나 일체의 행동이 입건할 가치를 찾지 못하여 7·17 제헌절에 예비검속해제로 석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대학경영진에 대한 각종 민형사 사건은 일방적으로 수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박태상 선생은 최후수단으로 한춘홍 교수와 함께 교수직해임의 무효 확인 청구소송을 법원에 제기하여 1심에서 승소하였으나 재단 측의 항소로 2심판결에서 패소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는데 상고 이유서에 동첨한 상고이유보충서는 36,000여자나 되는 장문의 보충서였습니다.

소송대리인의 비중을 높이기 위하여 전 대법관 오필선(吳弼善)변호사의 공동수입이 필요했으므로 박태상 선생은 오변호사를 심방하여 검토를 위해 상고이유서 및 동 보충서를 놓고 왔으며 2일 뒤에 찾아가니 오변호사는 무보수 소송대리인으로 자서날인하여 주었기 때문에 대법원 승소를 확신하였으나, 상고기각 또 재심기각 등으로 10년의 세월이 흘렸던 것입니다.

3. 한시로 울분을 달래다

법정투쟁으로 조선대학교의 민주화운동은 달성할 길이 없어졌고 복직투쟁도 패배가 되어 부득이 귀거래사를 부르고 보성군 득량만 연안에서 패류양식어장을 경영하였으며 한시를 지어 울분을 달래고 궁지에서 분발과 역경에서 용기를 얻게 한 것은 오직 한시의 힘이었으며 세상을 유유히 관조하면서 재기를 꿈꾸게 하였던 것입니다.

4. 후기의 조선대학교 민주화 운동

조선대학교에서 1980년 다시 학원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교수의 퇴진과 학생의 희생만이 연출되었으며 1987년 또다시 학원사태가 발생하여 총장퇴장을 주장하였는데 이 보도를 접한 박태상 선생은 그 주장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되어 걱정하였으나 마침내 투장지도부에서 광주·전남도민이 설립한 대학의 역사를 변조하였으므로 당연히 도민대학으로 되찾아야하며 따라서 이사진 해체와 관선이사선임으로 주장을 전환하여 새 국면이 전개되었습니다.

1988년 2월 4일 이사진 해체와 관선이사가 선임되었는데 이 때 박태상 선생도 관선이사로 참여하였고 곧 상임이사로 선임되어 인생항로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선생은 대학에 도덕성을 회복하여 퇴출된 경영진이 대담하게 자행하였던 대학설립역사 변조를 시정하여 숭고한 설립역사를 학내외에 선양하였으며 구경영진의 비리를 조사하여 사법적 조치를 단행하였음에 또 조선대학 설립동지회 기념탑 건립을 발휘하여 준공까지 이를 주도하였으니 이는 구체제의 탈환방지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강구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조선대학교법인의 초대 관선이사진의 임기는 오래가지 못하였으나 구 경영진의 재탈환기도에 철저히 대응한 결과 구경영진의 제소사건들이 모두 패소로 끝난 것은 박선생의 불굴의 의지와 10여년에 걸친 법정투쟁에서 얻은 해박한 법률적 지식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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