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순(崔碩淳) 선생(미상 ∼ 1925. 2. 25)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기는 미상이나 동생인 최석준(崔錫俊)이 1892년 출생인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태어난 것이 확인된다. 1919년 3월 31일부터 5월까지 삭주지역에서 거세게 일어난 3·1운동을 동생인 최석준이 주도하였고, 이 시기에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것을 보면 선생 또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은 1919년 남만주의 의병계열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집서(輯西)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 남만주 독립군 단체의 통일조직인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의용군 제2중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4년 4월에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해야 한다는 선언서에 남만 군인대표 78명과 함께 서명하였으며, 5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참의부로 약칭)가 결성되자 참의부 의용군 제2중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참의부 최고 지도자인 참의장의 역할을 겸임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하는 등 혁혁한 활동을 벌였다.
참의부는 1924년 5월 19일 압록강 일대를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만주의 독립운동을 크게 고무시켰고, 한만 국경지대의 안정을 대내외에 선전하려던 조선총독부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이에 일제는 남만주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여 실행하였고, 고마령 참변은 이러한 와중에 발생하였다.
1925년 2월 선생은 참의부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과 군자금 모집, 일제 기관 파괴 등의 안건으로 참의부 소속의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집안현 고마령(高馬嶺)에서 주재하였다. 이 정보를 밀정으로부터 입수한 일제의 초산경찰서 경찰대 65명은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비교적 안전한 지대여서 방심한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부대원들은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저항했지만 끝내 20여 명(일제측 기록에는 42명이 전사)의 동료들과 함께 1925년 2월 25일 전사, 순국하였다.
고마령 참변은 참의부의 독립전쟁 수행 시기에 최대의 참사였으며, 커다란 전력의 손실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참의부 소속의 독립군 부대는 일제에 보복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일대에서 계속 활약을 하여 독립운동의 기치를 드높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최석순 선생 공적내용 요약
ㅇ 1919 평북 삭주에서 3·1운동 참여
ㅇ 1920 대한독립단 집서지단장으로 활약
ㅇ 1922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2중대장으로 활동
ㅇ 1924 참의부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무장투쟁
ㅇ 1925 고마령전투에서 전사, 순국
ㅇ 1995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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