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주기철 선생

천안--(뉴스와이어)--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주기철(朱基徹) 선생을 2007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ㅇ 기간 : 2007. 11. 1 ~ 11. 30
ㅇ 장소 : 근대민족운동관(제2전시관) 내
ㅇ 내용 : 선생이 1936년부터 순국하는 1944년까지 부임한 평양 산정현교회 등 자료 20여점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진해시 웅천1동)에서 태어난 소양 주기철 선생은 1913년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3월 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웅천읍교회의 집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성직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고 1922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생은 1925년 1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를 시작으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1년과 1932년에는 경남노회의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당시 교계의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설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1931년 만주침공 이후 신사참배를 점차 강요해온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황민화정책을 강화하고 신사참배를 독려하였다.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일제의 강요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에 맞서 단호히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첫 번째로 구속된 선생은 이후 일제의 검속으로 1940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38년 9월에 옥중에서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한 선생은 출옥 후에도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굳게 반대하다 다시 피체되어 야만적인 고문을 받았다. 선생이 부임한 평양 산정현교회 또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40년 3월 교회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1940년 4월, 3차 투옥 후 평양경찰서에서 풀려나 가택에 연금되어 있던 선생은 1940년 9월 20일 다시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자를 일체 검거함에 따라 4번째로 피체되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약 5년에 걸쳐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선생은 결국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웹사이트: http://www.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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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기획조정실 홍보팀 양원길 041)560-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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