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도연 선생

천안--(뉴스와이어)--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김도연(金度演)선생을 200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ㅇ 기간 : 2009. 2. 1 ~ 2. 28
ㅇ 장소 : 제1전시관(민족전통관) 출구
ㅇ 내용 : 2.8 독립선언서 등 관련자료 22점

김도연 선생은 신학문을 배워 국권회복의 힘을 키우기 위해 태극학교와 보성중학교에서 근대학문을 공부하였다. 또한 일본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그들에 대한 투쟁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에 1913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긴조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제학으로 유명한 게이오대학 이재과(理財科)에 들어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선생은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고 이를 영문과 일문으로 번역하여 각국 공관에 발송하는 한편, 태극기를 준비하여 동경시내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경 유학생 임시총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학생들은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채택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동경시내를 행진할 계획이었으나 일경들은 회관을 완전히 포위하고 선생을 비롯한 30여명의 학생들을 붙잡아갔다. 선생은 7개월의 실형이 언도되어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감 후 1922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선생은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삼일신보(三一申報)』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간하는 등 유학생들의 친목도모와 독립운동 후원에 힘썼다.

워싱턴의 아메리카대학에서 『한국의 농촌경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경제학원론과 경제학사를 맡아 강단에 섰으나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한계를 느껴 실업계에 투신하게 되었다.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대표이사에 취임하여 그 수익금으로 조선어학회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다가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붙잡혀 무려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도연 선생은 감옥에서 출소한 지 7개월 만에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창당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 서울에서 당선되었고,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재정분과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초대 재무부장관에 취임하였다. 이 후 제 3, 4, 5, 6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제5대 국회에서는 민의원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65년 8월 한일협정 국회비준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국의 장래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평생을 분투했던 선생은 1967년 7월 19일 73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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