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6월의 독립운동가 김익상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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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2010-05-31 10:16
천안--(뉴스와이어)--독립기념관(관장 : 김주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김익상(金益相)선생을 201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6월 한달 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김익상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21년 베이징(北京)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선생은 1921년 9월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소지하고 국내로 들어와, 9월 12일 전기 수리공으로 신분을 속이고 당시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로 들어가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여 조선총독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폭파의거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선생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의열단원인 오성륜·이종암과 함께 다나카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922년 3월 28일 다나카가 상하이 황포탄 세관부두에 도착하자 먼저 오성륜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미국인 부인이 맞고 쓰러졌다. 다나카가 놀라 도망치자 선생이 권총을 쏘고 계속하여 폭탄까지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아쉽게도 다나카를 처단하려는 거사는 좌절되었고 현장에서 선생과 오성륜은 붙잡혔다. 선생은 이 황포탄 의거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수감되었다가 나가사키(長岐)로 호송되었다.

선생은 같은 해 11월에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는 일제의 재판에 기대할 것이 없었고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사형 판결에 상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감형으로 16여 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일본인 고등경찰에게 연행된 후 그 이후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제5·6전시관 사이의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6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선생이 폭파의거를 결행한 조선총독부 등 관련사진 15점을 전시한다.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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