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무장독립운동의 획기적 자료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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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2010-08-11 10:33
천안--(뉴스와이어)--독립기념관 (관장 김주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그동안 이름만 전해오던 ‘신흥교우보’의 원본을 범국민 역사자료 기증운동의 결과 새롭게 발굴, 수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간 ‘신흥교우보’는 재미한인들이 발행하던‘국민보’와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에 거주하던 재러한인들이 발행하던 ‘권업신문’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알려져 왔는데 이번 광복절을 기해 그 원본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 ‘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개관

ㅇ 크기 : 17.7mm×26.2mm
ㅇ 분량 : 등사본, 갱지, 100면
ㅇ 편집겸 발행인 : 강일수
ㅇ 발행소 : 신흥교우단
ㅇ 차례 : 논단, 강단, 학원(學苑), 소설, 문림(文林), 축사, 잡저(雜俎), 회중기사(會中記事)
ㅇ 발간일 : 중화민국 2년(1913년) 9월 15일
ㅇ 성격 : 중국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추가가(鄒家街)에 1911년 설립되었다가 1912년 7월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확장 이전한 신흥강습소(독립군 양성 무관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들의 조직인 ‘신흥교우단’의 기관지적 성격을 띤 잡지.
ㅇ 의의
1) 이번에 새로 확인된 ‘신흥교우단’은 단순한 졸업생 및 재학생들의 모임이 아닌 독립운동 및 사회 혁신·계몽운동을 추진하는 ‘혁명결사’적 성격을 띤 단체임이 밝혀짐.

2) 기존에 잘 알려진‘신흥학우보’제2권 2호(1917년 6월 발행)와 비교해본 결과 거의 유사한 구성과 편집체제로 되어있고, 편집인이 강일수(姜一秀)로 동일인이어서 신흥교우보가 신흥학우보로 개칭된 사실을 알려줌.

ㅇ 주요 내용 개관 : 대부분 독립운동 및 애국·계몽운동 관련 글로서 1910년대 초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고투하던 신흥강습소 졸업생 및 학생들, 교직자 등 관련 인물들의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글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됨.

1)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인데, 중국동북의 서간도(남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이 이 날(8월 29일)을 잊지 않고 절치부심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고 있는 글이 두편이나 실려있고, 서간도일대 동포들의 ‘국치기념일’ 행사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글이 여러편 있어 오늘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 왕삼덕(王三德), ‘8월 29일 기념취지서(寄書)’
- 촌바위, ‘8월 29일에 대하야’
- ‘유하현(柳河縣) 주지갈(?) 국치기념일 광경의 대강’등이 있음.
- 특히‘유하현(柳河縣) 국치기념일 광경의 대강’에서 동포인 박혜숙 여사가 이 날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만세’라고 혈서를 썼다는 대단한 내용도 실려 있어 주목된다. (79쪽).

2) ‘잡조’에 실린 ‘고구려영락태왕 묘비문’은 1903년 12월에 중국인 영희(榮禧)가 발간한 ‘고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고(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라는 책에 수록한‘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을 전재하여 고구려 역사 및 광개토대왕에 대한 자부심과 큰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3)‘등본영락태왕기적비(謄本永樂太王紀積碑) 유감(有感)’기사에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영락태제(永樂太帝)’라고 표현하여 고구려를 ‘황제국’으로 인식하고 광개토대왕을 ‘황제’로 인식하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이고 있음.

4) 대우강(大愚姜, 편집자 姜一秀로 추정됨), ‘하기기행문(夏期紀行文)’은 필자가 고구려의 산성과 환도산성 등을 답사하며 고구려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강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알 수 있다.

5) 이 책에서 필자들은 우리민족을 ‘부여민족’으로, 단군을 ‘대황조(大皇祖)’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주목됨.
6) 신흥강습소 설립의 주역인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소영(李韶榮)·이호영(李護榮) 등 6형제의 후손인 이규훈과 이규준의 미발굴 시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 이건영(李健榮)의 3남 이규훈(李圭勛, 1896~1950)의 시 : ‘시내물 두고(한글 시)’
- 이석영(李石榮)의 장남 이규준(李圭駿, 1899~1927) 한시: ‘추야강무유감(秋夜講武有感)’

* 이규준은 신흥강습소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종사. 특히 변절 한인들을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을 사촌형 이규학(李圭鶴)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한 것으로 유명함. 상해에서 활동하던 김달하(金達河) 등을 처단하고 중국 중원의 한구(漢口, 한커우)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병사함.

새 자료 발굴의 핵심 내용

지금까지 ‘신흥학우보’(제2권 2호, 1917년 1월 13일 발행, 독립기념관 원본 소장)로 알려져 왔으나, 당초 ‘신흥교우보’로 1913년 (6월경) 창간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당초 명칭은 ‘신흥교우단보’ 였으나, 발행시 ‘단’을 빼고 ‘신흥교우보’로 명명한 사실이 규명되었다.

지금까지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신흥학우단’이 1913년 3월 창단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발굴된‘신흥교우보’2호를 통해 당초 ‘신흥교우단’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5월 6일 창단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신흥교우단은 1916년 말경 ‘신흥학우단’으로 개명하였고 기관지인 ‘신흥교우보’도 ‘신흥학우보’로 개제되었다.

지금까지 신흥학우단은 1913년 3월 신흥학교의 졸업생 등이 중국 동북의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이번‘신흥교우보’의 발견으로 1913년 5월 6일 신흥강습소가 있던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서 조직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 책의 끝부분에 있는 ‘신흥교우단 역사의 대개(大槪)’(91면)에 따르면 신흥교우단의 구성원들은 주로 이 학교 졸업생들로서 1913년 5월 10일 제1회 임시총회를 신흥강습소에서 열었다고 하는데, 이때 25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 명단은 창간호에 10명을 수록하였고 이 책(제2호)에 이형국(李衡國)·이의직(李義直, 이동녕의 아들)·강일수 등 15명을 기록하였다.

‘신흥교우보’는 국내와 만주(중국동북) 지역은 물론, 미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 등 해외 교포들이 있는 지역까지 널리 배포되어 읽혀지는 등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변지 역할을 하며 신흥강습소 및 그 관련 인물들의 활동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특히 해외 교포신문들의 ‘신흥교우보’발간 및 발전, 도착 소식 등 보도 및 내용소개, 전재 등이 여러차례 있었다. 이는 ‘신흥교우보’가 단순하게 일개 학교의 잡지가 아닌 남만주지역 독립운동계를 대변하는 기관지로 인식되어 해외 동포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사실을 반영한 것.

* 특히 이번에 발굴된 ‘신흥교우보’제2호의 발간과 해외 전파소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재미(하와이) 교포들이 1907년 창간하여 발행하던‘신한국보’를 개명한 신문인‘국민보’는 1913년 10월 22일자에 ‘신흥교우보의 출세(出世)’ 기사를 보도하였는데, 주목되는 사실은 제2호를 하와이에서 우편으로 전해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본현 우편국으로 좇아 본사 편집실에 배달되는 통신 서류 중에 한가지 기쁜소식을 얻으니 이는 곧 중국 통화현 합니하에 있는 한인 학생이 발간한 신흥교우보러라. 반갑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여 바쁜 손 기쁜 마음으로 첫장부터 시작하여 끝장까지 읽으니 대개 90여 페이지로 편집하였고, 9월 15일에 발행한 제2호이며 편집인은 강일수 씨더라.”

* 특히 ‘국민보’1914년 4월 8일자는 ‘신흥교우보를 위하여 중앙교육회를 조직’이란 기사를 실어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이 기사는 “서간도에 헤어져 있는 우리 동포의 교육계에 대한 가득한 열성으로 말미암아 신흥교우보가 세성에 탄생된 것은 국민보가 이미 소리쳐 전한 바인 고로 일반 동포는 신흥교우보의 이름과 행적을 기념하며 찬양하여 영원히 잊지 아니할 듯……”이라고 이 잡지 발간의 의미를 크게 강조하였다.

지금까지 ‘신흥무관학교’로 많이 알려져 왔으나, ‘신흥강습소’로 불리웠던 사실이 확인되었고, 신흥강습소의 조직과 구성원의 면모가 새롭게 밝혀졌다. 그리고 교장에 대해서는 이철영·이동녕·이상룡·이광·이세영·윤기섭 등 여러 설이 있었으나, 교장이 아닌 ‘소장’ 윤기섭(尹琦燮)으로 명기되어 있어 신흥강습소의 조직과 구성원의 면모가 새롭게 규명되었다. 적어도 1913년 9월경 교장(정식 직책은 소장)은 윤기섭으로 확인되었다.

독립기념관 소장 ‘신흥학우보’ 제2권 2호(1917년 1월 13일 발행)와 비교해본 결과 거의 유사한 구성과 편집체제로 되어있고, 편집인이 강일수(姜一秀)로 동일인이어서 신흥교우보가 신흥학우보로 개칭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 미주지역에서 새로 발굴된 ‘신흥교우보’제2호(1913년 9월 15일 발행)는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으며, 1910년대 남만주(서간도) 지역 ‘신흥강습소’를 중심으로 한 해외 민족운동세력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진귀한 기록이다.

독립운동의 본류인 무장독립운동과 독립군 간부양성의 산실인 신흥강습소의 초기 조직과 활동을 처음으로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이번 자료의 발굴은 2011년 신흥강습소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학계의 독립운동사 연구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된다.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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