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 고삼권 2인전

서울--(뉴스와이어)--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8월 10일부터 인사동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 고삼권 2인전>을 개최한다.

인민예술가 홍영우 화백과 공훈예술가 고삼권 화백은 일본에 있는 이북의 교민단체 총련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미술가로서 홍영우 화백은 조선화가로서 우리의 민족성을 보여주는 풍속화를 그리고 있다. 또 고삼권 화백은 유화가로서 우리 민족의 감성이 담긴 매우 개성있는 유화를 그리고 있어 이 두 화가는 해외동포의 화단에서 매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광복60주년과 6.15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두 화가의 초대전을 개최하여, 앞으로 남북간의 미술교류가 본격화되어 민족화해와 통일시대를 열어나가는 일의 시발점을 다지고, 아울러 우리 민족의 미술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또 하나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자 한다.

명 칭 : 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 고삼권 2인전>
일 시 : 서울; 2005년 8월 10일(수) 10:00 ~ 16일(화) 13:00
제주; 2005년 8월 22일(월) 10:00 ~ 28일(일) 13:00
장 소 : 서울;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아트사이드”
제주; 제주시 “학생문화원” 전시실
주 최 : (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사) 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개 요 : 전시작품은 홍영우 40여점, 고삼권 30여점으로 하되,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긴 작품을 위주로 전시.

- 광복60주년 6.15공동선언5주년기념
‘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ㆍ고삼권 2인전’격 려 사
박 용 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고문

하나인 우리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선지 60년이 되었습니다. 헤어지면 다시 만나게 됨은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듯이, 60년 전에 헤어져 갈라선 민족은 하나로 될 날이 운명적으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남과 북의 미술인들이 남긴 많은 작품들을 살펴보면, 서로 다르기도 하고 서로 같기도 합니다. 다르기도 하다는 것은 서로 달리 발전해 왔음을 의미하며, 같기도 하다는 것은 서로 같은 민족적 감성과 역사인식을 가지고 작품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남과 북의 미술이 서로 다른 면은 다른대로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그리고 서로 같은 면은 서로의 공통분모로서 발전시켜 나갈 때, 우리 남과 북의 미술계는 통일의 역사를 이미 써나가는 것이고, 또한 이미 통일을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과 조국의 분단을 한 맺히게 느껴온 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ㆍ고삼권 화백의 2인전을 서울과 제주에서 개최하는 것은, 또 하나의 통일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두 화가와 2인전을 준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초청의 말씀
김 용 태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재일동포화가들의 미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본에서 나고 자란 화가라는 것을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후에 일본에서 조선국적의 동포로 살아간다는 것은 차별과 모멸감을 극복해야 하는 고단한 삶을 의미합니다. 이번에 재일조선민족화가 2인전에 참가한 홍영우 화백은 스무살이 되도록 우리 말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 그와 고삼권 화백에게 우리 민족성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일본인들의 준 민족적 차별과 모멸감이었다고 말합니다.

화가에게서 현실의 극복은 창작으로서의 저항이 아니면 타협이나 현실의 외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민족적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것이 민족성의 고수(固守)였고, 그러한 결심이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홍영우 화백은 조선의 고유색이 짙은 풍속화를, 고삼권 화백은 우리의 인간군상과 꿈에 그리는 고국산천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들의 작품에는 이들의 치열(熾烈)한 인생역정(人生歷程)과 민족의식이 숨겨져 있는 것 입니다.

중국이나 유럽과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해외동포미술가들의 작품에서는, 몇몇 화가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민족의식이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해외동포 화단에서 국적이나 민족성이 없는 창작은 외래미술에 대한 흉내에 불과하다고 친다면, 이에 이 두 화백의 미술세계는 그 만큼 고귀하다 하겠습니다. 이 두 분의 화백을 국내의 화단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2인전에 초대하며...
장 영 달 국회의원, (사)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이사장

금년은 광복 60주년이자 6.15공동선언 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된 110주년이자 을사조약이 강압체결된지 100주년이며 한일국교재개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러한 외세가 가져다 준 우리 민족 근ㆍ현대사의 비애(悲哀)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투쟁(鬪爭)이 돋보이는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우리가 우리 민족의 현재 시점과 미래를 위하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명확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외세의 극복하고 우리 민족과 국토를 자주적으로 평화 통일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맞이는 민족문화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민예총과 함께 재일동포 화단에서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ㆍ고삼권 두 분의 화백을 초대하여 2인전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화가는 매우 가까운 동갑의 친구 사이지만, 창작분야는 조선화와 유화로, 창작의 주요 주제는 풍속화와 인간군상으로 달리하며, 각자가 개성이 강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두 화백의 초대전을 함께 여는 것은 이러한 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재일조선민족화가 홍영우ㆍ고삼권 2인전이, 남ㆍ북ㆍ해외의 우리 민족미술이 하나가 되어 민족과 통일을, 순수한 미의 추구를 함께 열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러한 길을 우리 민족 구성원 개개인 모두의 힘을 합하여 열어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홍영우(洪永佑) 약력>
조선화가, 인민예술가, 조선미술가동맹 맹원,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맹원
1939년, 일본 아이찌현 출생 (부친의 고향은 경북 군위)
1980년부터, 재일조선인중앙미술전, 일조우호전에 참여
1981년부터, 도쿄에서 3회, 오사카에서 2회 개인전을 가짐
일본에서 개최된 “고구려문화전”의 진행에 참여
1987년, 해외거주의 북의 교포 미술가로는 처음으로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받음
1992년,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중앙미술부장
1992년, 국가미술전에 작품 『쇠장(20호)』이 입선되어, 조선미술박물관(평양)에 국보(국가보존작품)로 소장됨
1993년,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실현하는 회” 해외동포미술가대표단 단장
1995년, 해외거주의 북의 교포 미술가로는 처음으로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음
2002년, 재일본조선력사고고학협회 부회장
2002년, 민화협의 초청을 받아 “특별기획전 고구려”의 대표단 부단장으로 방한
특기사항:
1. 창작분야는 조선화 가운데서도 풍속화이며, 방북시 한때 월북한 인민예술가 청계 정종여(1914.12.30~1984.12.30)로부터 사사받았고, 북의 고고학자 주영헌 원사(원로박사)와도 친분이 돈독하였음
2. ‘홍길동’과 ‘장길산’을 주제로한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였음
3. 조선화보사의 편집국장과 조선신보사의 잡지출판국장 등의 직에 있으면서 북의 『조선미술박물관』 도록(1980년, 조선화보사)과 『고구려고분벽화』 도록(1985년, 조선신보사)의 발간을 주도하였고,‘고구려문화전실행위원회’의 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북한의 문화재와 역사 분야에 관련된 다수의 책을 편집 및 번역한 바 있음. 이 가운데 『조선미술박물관』 도록은 북의 현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고구려문화전실행위원회’의 진행에 참여한 것은 2002년 남에서 ‘고구려특별전’을 성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

고삼권 (高三權)
유화가, 공훈예술가, 조선미술가동맹 맹원,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맹원, 일본 자유미술회 회원
1939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60년부터, 재일조선인미술전 · 조선청년전에 참여, 일본 안디판단전 · 일조우호전 · 평화전 출품
1979년부터, 도쿄에서 4회, 오사카에서 4회, 프랑스 파리에서 2회 개인전을 가짐
1982년부터, 자유미술전 출품
1983년, 84년, 나롱 · 두 · 돈누전(파리)에 출품
1985년, 파리 · 소시에티 내셔널 두 · 보자르전(국제전)에 출품
1993년, 코리아통일미술전에 참여.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음
특기사항:
1. 창작분야는 유화이며, 고암 이응노(1904.1.12~1988.1.7) 화백이 후견인으로 프랑스로 초청하여 2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어 주었음
2. 수상 경력; 특상 · 가나가와현지사상, 타나상(2회)

-홍영우ㆍ고삼권 2인전에 부쳐
하리우 이찌로(針生一郞, 문예ㆍ미술평론가)

고삼권의 작품은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더욱이 그 속에서도 중심적이며 비판과 저항의 화가로 알려진 고 이노우에 쬬자브로(井上長三郞)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 자기의 독자적(獨自的)인 작풍(作風)을 이룩한 것으로 추찰(推察)된다. 그것은 활달하고 굳센 묘선(描線), 날쎈 흰 하이라이트를 포함한 담채(淡彩)의 배치속에 견고한 구도와 격렬한 움직임을 담은 인물화에 그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주제는 많은 경우 소, 새와 함께 조선 농민 남녀의 군상(群像)인데, 이노우에 쪼자브로가 비판과 풍자로 향하는데 비해, 그의 그림에는 북을 치며 춤추고 노래부르는 소녀들의 그림이 보여 주듯이 마치 축제와 같은 생활의 기쁨이 넘쳐 흐르고 있다. 그의 많지 않은 풍경화 역시 바다와 같은 구름, 산과 섬을 원망(遠望)하고 근경에 단풍(丹楓) 숲을 배치하는 등 거의 추상적인 구상인데, 일본의 풍경속에서 고국(故國)의 섬과 산을 상상(想像)하여 담아내는 사념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홍영우의 그림은 근래에 이르러서는 조선시대의 회화에 의거하는 듯하다. 일본에 조선민화(朝鮮民畵)를 처음으로 소개하여 상찬한 야나기 므네요시(柳宗悅)가 조선민화의 색채의 기조를 백자에 대표되는 흰색이라고 말한 탓으로 많은 한국사람들의 반론에 부딪친 것처럼 조선시대의 궁정회화(宮廷繪畵)나 민화에는 장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다채(多彩)한 일면도 있어 홍영우도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제에서 말하면, 모두 산수화적(山水畵的)이지만 눈여겨 보면 산과 강, 숲 사이사이에 조선시대 복장(服裝)의 군중(群衆)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화(歷史畵) 아니면, 농민이 모여든 우시장(牛市場)의 광경을 보면 더 적합하게는 새로운 민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에 의거한 단련되고 숙달한 수완(手腕)으로 풍경과 인물을 구사하면서 “산중(山中)의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작가의 본령(本領)을 본다.

고삼권과 홍영우는 재일 미술계의 중심적 화가이다. 나는 고삼권과는 일찍부터 잘 아는 사이인데, 홍영우와는 십수년전에 내가 의장을 맡고 있는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 주최로 도쿄에서 2번에 걸쳐 개최된 《남북코리아통일미술전》의 출품자의 한사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고삼권을 먼저 소개한 것은 그와의 교우가 앞선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없다.

이 두 작가가 남북통일을 비원(悲願)하여, 총련과 민단의 재일 조직의 벽을 넘어서 초대를 받아 한국의 서울과 제주에서 2인전을 개최하게 된 것은 일본인인 나에게 있어서도 큰 기쁨이 아닐수 없다. 그것은 이 두 작가전을 통하여 재일동포미술의 높은 수준을 한국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반도의 남북이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상황에서 통일을 원하고 민족주의가 고양(高揚)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이미 많은 코리안들이 러시아 유럽 오스트렐리아 남북아메리카 대륙 등지에서 거주하며 현지의 풍토와 문화에 적응하면서 자기들의 아이텐티티(identity, 정체성)를 모색하고 있는 현재, 이와 같은 모든 모색과 갈등을 포괄(包括)하는 유연(柔軟)하고 폭넓은 민족주의로 성숙되여 주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재일작가인 이 두 사람을 한국의 화단에서도 수용하는 것이 성숙된 민족주의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평을 쓴 ‘하리우 이찌로(81세)’는 일본의 저명한 문예ㆍ미술평론가이다.

-고삼권 · 홍영우의 전람회에 부쳐
최 석 태 (미술평론가)

광복 60주년과 6·15 공동선언이 있은 지 5주년을 기념하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과 (사)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이 힘을 합쳐 2인전을 열게 되는 고삼권과 홍영우, 이 두 분은 일본에 사는 동포들 가운데에서 널리 알려진 화가이다. 두 화가는 1939년 생의 동갑내기로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하지만, 각자 개성이 강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창작 분야가 유화와 조선화로 각기 다른데서 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다 싶다. 이 두 화가를 한 자리에 모시는 것도 이러한 대비를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필자에게 두 분은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멀게도 느껴지는 존재다. 두 분 중에서 먼저 알게 된 분은 홍영우 선생님이다. 그의 경우에는 십수년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번 만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떨리는 만남이었다. 이전부터 그가 편집하는 월간지는 상당히 오랫동안 관찰 대상이었다. 한 신문사가 발행하는 미술전문지의 기자로 일하던 중 그 신문사 소속의 북한 및 공산권 연구소가 있어서 북한과 재외 동포 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쉬웠다. 그 연구소에 다달이 오는 것을 종종 가서 접하면서 홍영우란 이름과 그의 그림들을 보았다. 필자가 일본으로 갔을 때 그를 직접 만나고자 한 것도 이런 경험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 후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위해 발행된 일본어로 된 그림책『홍길동』을 통해 홍영우 선생님의 삽화를 보기도 했다. 막상 그의 그림을 직접 본 것은 몇 년 전, 민예총에 조그마하지만 그의 그림이 걸려 있어서 반가와 하기도 했다. 그가 편집하던 잡지에 실린 삽화들과 그림책의 그림, 그리고 직접 본 소품을 두루 관통하는 정신은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삼권 선생님의 경우, 지금은 돌아가신 화가 이응로(1904-88) 선생님이 1987년 10월에 프랑스에서 열어준 개인전의 도록을 언제, 어떻게 구했는지 잊었지만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종종 펼쳐 보고 있었다. 그가 다루는 소재는 풍경과 사람으로 딱 쪼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모국을, 후자의 경우 민족 성원들의 고난을 떠올리게 하였다. 같은 소재를 되풀이 한다고 할 정도로 집착하는 화가들의 경우, 깊이있는 처리의 정도로 화가의 역량을 가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집념과 끈기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화가이다.

그의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온 것은 지난 2002년 3월이었다. 일본의 교토시미술관에서 동포들이 개최한 대규모 전시의 한 부분으로 마련된 조각가 권진규의 조그만 전시를 계기로 그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청으로 갔던 것이다. 나로서는 일본에 사는 동포들의 작품들 실제 접하기로는 처음이었다. 감격적인 조우 속에서 특히 동포들의 작업을 모은 개인전 도록이 흔치 않은 가운데, 도록을 통해서나마 친밀해졌던 고삼권 선생님이 출품한 상당히 큰 근작 2점은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작품의 크기도 이전 개인전 도록에 수록된 것보다 컸지만, 무엇보다 느낌이 더 커졌다는 인상이었다. 한 예술가로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역량을 화창하게 펼쳐가고 있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출품작 중의 하나인 <땅>이라고 한 그림의 경우 노인과 소라는 자주 다루는 소재 외에도 젊은 남자들을 첨가하여 거의 군상화에 가까워졌다.

직접 만나거나, 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다른 누구보다 가까워진 듯한 착각을 하게 된 나는, 이번에 두 분이 함께 전람회를 이 땅 서울에서 개최하게 되고, 그 인사말을 쓰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일 자체에 놀라워하는 호들갑을 떨어도 본다.

고삼권 선생님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의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40대 초가 되는 1979년부터 도쿄와 오사카에서 모두 8번, 이응로의 주선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가진 2번의 개인전 등 모두 10차례의 개인전을 연 노장이다. 첫 개인전 이후인 1982년부터 지유텐에 출품하면서 화가로서의 이력을 더욱 높여갔다고 하는데, 이 전람회는 이중섭과 재북화가여서 우리에게 잊혀져 버린 이름인 문학수가 맹활약했던 단체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 식민지시대에 누구보다도 문화정체성이 높았던 두 사람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 성공하게 했던 단체가 지유텐이었다.

고삼권 선생님은 상당히 많았을 작품들이 수년 전의 화재로 대다수를 잃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마련되는 서울전에는 그의 유명한 몇몇 작품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에게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한 동력은 바로 언젠가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어 자신의 민족성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나 싶다.

한편, 홍영우 선생님은 재일동포 화단에서 널리 알려진 조선화가이다. 또한, 그는 국내의 민족미술작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된 “코리아통일미술전”에서 해외동포미술가의 참여를 책임진 해외동포미술가대표단 단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에서 특이한 것은 흔히 총련계 동포라고 하면 민족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고삼권선생님과 함께 1939년생인 그는 스무살이 되도록 우리말을 몰랐다고 한다. 해방과 이어진 분단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진 전쟁 속에서 빚어진 일로 짐작된다. 그러한 그가 민족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일본인들의 준 민족적 차별과 모멸감이었다고 한다. 그의 본령이 우리 민족의 풍속을 그리는 일인 것은 그러므로 역설적인 일인데, 그것은 일본에서 나서 자란 그가 부모로부터 들어온 고향(경상도)에 대한 절실한 향수와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겪어온 민족적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오히려 민족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더 기울였던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그의 풍속화들에 나타난 우리 풍속은 국내에서 민족적 차별이 없는 가운데 풍속화를 그려온 몇몇 작가와는 달리, 치열한 역정에서 오는 민족의식이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홍영우 선생님은 한 때 북의 정종여(1914-84)로부터 사사를 받은 바 있고, 북의 유명한 고고학자인 주영헌 원사(원로박사)와도 친분을 돈독히 하였던 바 있다. 정종여와의 만남은 예술적인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주영헌 원사와의 만남은 민족사에 큰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러한 가운데, 홍영우 선생님은 조선화보사 편집국장을 지내면서『조선미술박물관』도록과『고구려고분벽화』도록(각각 1980년과 1986년 발행)을 펴내게 되고, 아울러 일본에서 <고구려문화전>을 개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하면서 남다르게 길러진 민족과 역사에 대한 인식은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지난 기간 주로 시장과 쇠장 등, 서민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을 담백한 조선화의 필치로 그려왔다. 이러한 그의 풍속화는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따 온 것들도 있고, 우리의 민담이나 고전 및 현대소설에서 소재를 끌어 내온 것들도 있다. 그의 홍길동을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은 고전소설에서, 임꺽정이나 장길산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은 현대 소설에서 소재를 끌어 내온 것이다. 이번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그의 예술세계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가 그 동안 창작하여 온 풍속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앞에서 몇 차례 조선화, 또는 조선화가라는 말이 나왔으나 설명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으나, 그럴 수는 없어서 첨언하고자 한다. 조선화라고 하면 북한의 정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머리글에 그림이란 의미의 화를 붙여 만든 말이다. 또한 남한에서 사용하는 한국화라고 하면 남한의 정식국호인 대한민국의 한국에 마찬가지로 그림을 붙여 만든 말이다. 연원을 따지면 북한은 일찍부터 이 용어를 썼다. 아직도 사용하기도 하고, 국립대학의 학과명으로도 남은 동양화라는 호칭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정체성이 정립된 편인 용어다. 지난 1993년 일본에서 열린 코리아통일미술전에서는 민족화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말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각기 발전했기 때문에 결과적인 양상은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공통되는 요소가 많은데, 그러므로 각기의 형편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병도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민족화라는 말도 조선화, 한국화라는 말도 내게는 아직 문화정체성이 덜 확립된 데에서 나온 임시적인 용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석태는 미술평론가, 미술저술가. 저서『이중섭평전』. 근대미술과 근대만화, 북한미술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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