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시사논평-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변명
그런데 대통령이 이렇게 지쳐 있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대통령이 정권을 이양하려고 하는데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식물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할 정도이니 국가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런 상태를 초래한 노 대통령의 무능도 비판받아야 할 일이지만, 노 대통령이 진심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싶어 하는데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우리사회의 무능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노 대통령은 왜 지쳤을까? 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노 대통령이 이런저런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싶어 하는데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의 이런 견해, 즉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싶어 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대단히 많을 것이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이고, 또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런 자리를 내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연정제안은 정권 재창출을 위한 술수일 뿐 정말로 정권을 이양할 의사가 있어서 내놓은 것은 아닐 것으로 보기도 할 것이다.
과연 노 대통령의 연정제안은 정략적 술수로서 정치적 입지 강화와 정권재창출을 위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노 대통령의 연정제안은 대통령직을 더 이상 수행하기 싫어하는 데서 나온 것이고, 그리고 노 대통령의 이런 제안들은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약회시키는 것은 물론 정권재창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노 대통령은 왜 사임하고 싶어 할까>
그러면 노 대통령은 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싶어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노 대통령은 자신이 멋진 대통령이 되고 싶은데 국정운영을 더 해서는 멋진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 같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 가지라도 하고서 지금 물러나는 것이 멋진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대통령 스스로 물러나는 초유의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극복이나 지역구도의 극복을 위해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대통령직을 내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다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물러나겠다고 하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들을 것 같아 지역구도의 극복과 같은 조건을 내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노 대통령이 사리에 합당치 못한 이유를 내세워 대통령직을 사임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노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아 더 오래 집권해보았자 꼭 해야 할 일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비난받을 일만 축적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통령직을 그만둘 명분만 있으면 그만두는 것이 그나마 역사에 길이 빛날 대통령이 될 것 같은 것이다.
둘째, 노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 예컨대 대통령 당선에 공이 컸던 사람들의 무리한 요청을 다 수용하면 자신이 역대 대통령과 꼭 같은 대통령이 될 것 같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 차라리 대통령직을 그만두는 것이 그나마 멋있는 대통령으로 남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사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광재씨의 경우 유전게이트에 관련되었으면 관련된 대로 처리되었으면 싶은데 절대로 자신이 희생될 수 없다면서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그냥 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 결국 유전게이트에 연루되지 않게 해 주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다 보니 결국 노 대통령의 이미지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수씨나 이재정, 정대철씨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노 대통령의 집권에 큰 기여를 한 사람들로서 상당정도 억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함께 노력해서 잡은 정권이 국민의 지지와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개인적 고난을 참아주었으면 싶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들을 살려주지 않으면 숨겨진 사실 모두를 불어버릴 듯이 해서 결국 그들을 석방하고 사면·복권 시키다 보니, 이전 정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되어 버려 국민들 보기에 부끄럽게 되었다고 보아 차라리 정권을 내놓아버리면 더 이상 이런 부끄러운 상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음 직하다.
셋째, 노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이 특별한 업적을 세우지 못할 바에야 중도하차를 멋지게 하는 것이 멋진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 것 같다. 지금과 같이 실정을 거듭하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퇴임할 경우 엄청난 재난을 당할 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측근비리에다 정치자금 문제가 걸려 있어 대통령 임기만 끝나면 구속될 가능성마저 있어 이런 사태를 모면하려면 중도에 멋있게 그만두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했음 직하다.
요컨대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진의를 몰라주는 정치권과 여론>
이처럼 노대통령은 그럴 듯한 명분만 있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싶어서 연정을 제안하는 것인데도 야당이나 언론은 물론 국민들조차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헌법을 위반하는 일’이라느니, ‘대통령 중심제에서 연정이 있을 수 있느냐’느니, ‘위기돌파를 위한 승부수’라느니 하는 비난에다 ‘한나라당에 정권 넘기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불륜의 부르스’ 등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으니 갑갑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자신이 심각하다고 생각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언론이나 국민이 냉담하고 그 안에 있는 부차적인 갈등요소만 부각되니 자기로서는 힘들 때가 많다’고 한 말은 진심일 것이다. 자신은 진심으로 연정을 통해 정권을 이양하면서 지역구도를 해소하고 싶어 하는데도 언론이나 국민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사임의사는 잘못된 것인가?>
그러면 대통령직을 사임코자 하는 노 대통령의 생각은 잘못일까? 물론 국민이 5년 동안 국정운영을 잘 하라고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중도에 사임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또 물러나려면 정직하게 자기로서는 더 이상 국정운영을 담당할 능력이 없어 물러나겠다고 하면 될 것을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국민을 헷갈리게 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노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담당할 능력이 없어서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비난이 얼마나 요란할 것이며, 국민적 실망 또한 얼마나 크겠는가? ‘무책임하다’, ‘정신병자다’, ‘어쩌다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나’하는 비난은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항의성 시위가 줄을 이을 것이다. 결국 물러날 수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는 물러나 보았자 퇴임 후 길거리에 나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신변위협까지 느낄 것이다.
여기에다 노 대통령은 이미 임기 초에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말과 함께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말을 해서 호되게 질책을 받은 일이 있고, 그리고 탄핵소추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당했다가 대통령직에 복귀한 일까지 있어 ‘특별한’ 사정이 없고서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노 대통령은 운신할 폭이 좁아졌는데, 이것은 노 대통령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도 더없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그만둘 명분을 찾자니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생각해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여소야대의 극복을 통한 국정운영의 정상화도 명분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이자 망국적 요인으로 지적되어 온 지역구도의 극복도 명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노 대통령은 자신이 임기를 채우고 퇴임했을 때 불미스러운 재앙에 직면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역대의 어떤 대통령보다 흠이 없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연정을 제안했을 때는 민주당과의 연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이양하는 대신에 열린우리당의 와해를 막아 자신을 보호해 줄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으나, 그것으로는 그야말로 정권재창출을 위한 꼼수라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것을 단념하고, 지역구도의 극복이란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한나라당과 연정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는 연정을 해보았자 실질적으로는 정권을 넘겨주지도 못하고 명분도 얻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한나라당과 연정을 해야 대통령직을 유지하더라도 대통령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넘겨주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역구도의 극복을 위해 정권을 이양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요컨대, 위와 같은 이유로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잘못일까? 잘못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심기일전하며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국정운영을 잘 하도록 하면 그것이 최상이겠으나, 국정운영을 잘 할 자신이 없는 마당에는 사임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국민들 입장에서도 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통령을 새로 뽑으면 될 것이다. 국정운영의 의욕도 자신감도 상실한 대통령을, 그것도 이미 2년 반 가까이 온갖 실언과 실정을 거듭해왔고, 앞으로 국정운영을 잘 할 것으로 기대되지도 않는 대통령을 그대로 두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사리가 이러한데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노 대통령을 지지하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사임을 반대하고, 노 대통령을 반대하는 세력은 노 대통령이 미워서 노 대통령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반대하고 비난하고 싶어서 노 대통령이 사임할 수 없도록 압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노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대통령직 사임까지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물러날 수 있는 길은 그나마 지역구도 극복의 명분을 내세우고 한나라당과 연정을 하는 것뿐이라고 보아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 대통령의 사임의사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할 자신도 없으면서 대통령이란 자리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는 것보다는 몇 배 훌륭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의를 물라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정치발전을 위해서 바람직스러운 일로 보는 것이 틀림없다. 노 대통령의 그런 판단은 옳다. 대통령도 잘못이 있거나 스스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물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금기시하니 딱한 일이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무오류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데, 이것도 비난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미 자신의 잘못이 많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리고 노 대통령의 그러한 무오류 기대는 콤플렉스와 소영웅주의에 기초한 것이어서 바람직스러운 것은 못되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의지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노 대통령의 이런 무오류 기대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필요 이상의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과거사정리니 안기부 X파일의 조사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오히려 우리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데다 국정운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긴 하나, 개인적으로 보자면 부도덕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노 대통령은 이미 국정운영의 의욕을 잃은 데다 연정을 통한 정권이양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대로 갈 가능성이 대단히 많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노 대통령이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빠질 것이다. 이미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터에 자신의 제안이 비난과 냉소의 대상이 되면 더욱더 비정상적이 될 것이다. 아마 노대통령이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불행하고도 창피스러운 일인가?
만약 위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노 대통령이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통령 비서진과 장관을 수시로 바꾸고 야당을 경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나라가 결딴나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노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한나라당이 연정을 수용함으로써 노 대통령이 물러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국민들이 노 대통령에게 지금까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어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국민의 이런 요구를 받들어 물러나는 것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대로 두는 것은 노 대통령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대단히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으로 하여금 물러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필자가 노 대통령이 물러날 뜻이 있어 연정을 제안했다고 주장하는데 대해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연정을 제안한 것은 위기돌파와 정권재창출을 위한 승부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필자의 판단이 착오일 수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근간에 한 말들을 종합해보면 본인의 이런 판단이 맞을 것 같다는 점을 부연해둔다
장기표시사논평 개요
철학이 있는 정치, 철학이 있는 삶의 기치아래 인터넷정치의 첫실험이었던 1995년이래 이어져온 장기표시사논평. 대량실업과 빈부양극화의 정보문명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초한 우리사회의 중요 현안에 대한 장기표의 독특한 견해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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