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제 99회 연구발표회

서울--(뉴스와이어)--한국역사연구회 중세 1분과 개경사연구반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구발표회를 한다.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생활공간이었다. 1996년 가을에 만들어진 한국역사연구회 개경사연구반에서는 그 동안 개경사연구동향 정리(1999), 연구논문 발표(2000, 고려시대 개경의 구조와 기능), 고려의 황도 개경(2002, 창작과 비평사)) 저술 등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을 종합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공동으로 해 왔다. 이번 연구발표회는 그 후속작업으로 개경의 공간기능과 시설이라는 주제로 갖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사도시 개경의 공간과 시설배치의 유기적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제: 고려시대 개경의 공간기능과 시설

발표자

1) 정학수, 개경의 범위와 공간인식
2) 한정수, 개경의 제사공간
3) 강호선, 개경환도와 사찰복구
4) 정요근, 경기지역 간선교통로의 변화

토론자: 정은정(부산대), 김철웅(고려대), 한기문(상주대), 김종혁(고려대)
사회자: 박종진(숙명여대)
장소: 대우재단빌딩 8층 2세미나실
일시: 2005년 9월 3일(토) 오후 2시

각 논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개경의 범위와 공간 인식(정학수)

개경의 범위는 개경을 다스리는 기관의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 곧 5部나 개성부의 관할영역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경의 공간 범위는 그 행정구역의 범위를 넘어 주변 경기 군현의 일부도 포함하여 인식하였다. 이곳은 왕경의 보위지역으로서 왕릉?사원?祭場 등 국가의 주요 시설들이 있었다. 이들 시설의 위치는 사료에서는 통상 개경의 郊 또는 경성?송악의 동서남북 등으로 표현하였지만, 地誌나 금석문 자료를 통해 그 위치를 비정해 보면 관할 영역 상으로는 경기지역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들 공간을 성종 14년에는 국가의 통치제도로 설정하였는데 赤?畿縣制의 시행이 그것이다. 따라서 개경의 범위와 공간 인식은 그 주변에 대한 인식 즉 교와 경기제와의 영역적 구별을 제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하겠다.

Ⅱ. 개경의 제사 공간(한정수)

고려시대 祀典 체계의 정비와 祭場의 설치 목적은 왕실의 조상숭배와 풍년을 비는 기곡, 재이해소를 위한 祈禳과 음양조화, 국가의 변고를 알리는 祈告 등에 있는 한편 왕실의 신성함과 위엄을 갖추어 알리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고려초기부터 개경의 공간 편제와 함께 사전체계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전체계를 국가운영과 도시구조의 편제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는가, 그리고 그에 따라 성소로서의 제장이 어디에 설정되었는가를 추정하였다. 이는 성소의 설치와 그 장소가 갖는 의미를 분석하여 개경과 관련하여 어떠한 상징성이 있는가를 추적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이 도내와 교를 중심으로 신성한 제사 공간이 그 목적에 따라 설치되는 계기였으며, 天地人의 신과 분야 신의 신격이 자리하는 성소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결국 수도의 도시기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사의례와 공간을 그 목적에 따라 편제하고 운영하였다는 점에서 중세 도시의 기능 중 중요한 부분이 확인되는 것이다.

Ⅲ. 개경 환도와 사찰 복구(강호선)

고려시대의 사찰은 궁궐?관청?성곽 등과 함께 수도 개경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이며, 개경 사찰의 변천은 고려 불교의 변화상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의 변화와도 흐름을 함께 한다. 고종대 몽골과의 전쟁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이전하면서 개경에서의 시설 또한 대부분 건설되었다. 이때 강화도에 만든 절의 대부분은 원래 개경에서 왕이 정기적으로 행차하던 사찰로 당시 고려에서는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관리하던 것이었는데, 이는 개경의 것과 똑같이 하겠다는 江都 운영의 원칙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원종대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이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전쟁으로 심하게 파괴된 개경을 복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환도를 준비하는 무렵부터 개경의 사찰은 조금씩 복원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도시기능 또는 수도로서의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이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Ⅳ. 경기지역 간선교통로의 변화(정요근)

개경에서 장단현을 거쳐 한강의 광나루에 이르는 長湍渡路는 고려초부터 개경과 남방 군현을 연결하는 핵심 간선로로 기능하였지만 11세기 중반 이후 그 역할은 서쪽의 臨津渡路가 대신하였다. 임진도로는 개경에서 임진현·남경을 거쳐 한강의 사평나루에 이르는 교통로로서 조선시대까지도 중시되었다. 임진도로가 핵심 간선로로 성장하였던 데에는 이동거리가 짧다는 점, 근방의 인구와 물산이 풍부해진 점 등을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임진도로 상에 남경을 건설하였던 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남경의 건설 및 임진도로의 성장은 이후 경기와 남경 일대 지방제도의 개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결국 남경이 11세기 이후 고려말까지 개경 남쪽 방면의 최고 요충지로 중시되었기에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임진도로 역시 핵심 간선로로 오랜 기간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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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한국역사연구회 연구위원회 남기현 간사 02-586-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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