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0월 정상 개관 불투명”
외래어 표기 오류일 경우 국제적 망신거리
특히 이번에 본 의원실에서 검토한 자료가 전체가 아니고, 한글 표기와 국한된 것이어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한다. 영어·중국어·일어로 적힌 패널에도 상당수 오류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코스가 될 국립중앙박물관이 국제적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우리말 문장이 잘못 돼 있는데, 이를 번역한 외국말이 바르게 돼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물 설명문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 하고, 그 과정이 장기화할 경우 부득이 개관을 늦춰야 할 형편이다.
본 의원실은 박물관 측이 설명 패널 개선 작업에 들어간 지난해 12월부터 지속적으로 적극적인 개선작업 진행의 확인을 요청했지만, 국립박물관은 전문가들을 총동원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 문제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지난 8월 박물관측이 보내온 자문회의 회의자료, 검토설명서 등에서 허술함과 무성의함을 발견하고, 교열전문가 등에게 적극적 재검토를 시행할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박물관측은 이미 패널제작에 돌입했고, 9월 12일에 설치할 것이며 이미 매킨토시 작업환경으로 넘어가 한글파일로 자료를 넘겨줄수 없다는 등의 납득할 수 없는 답을 되풀이 했다. 이에 민병두의원실은 의원실 자체 비용을 들여 설명자료 재검토에 들어가겠다고 통보하고, 교열전문가들에게 용역을 의뢰했다.
까닭은 개관 후 오류찾기 작업을 벌일 경우 막대한 국가예산을 낭비하게 되고, 또 수정하는 기간 동안 국민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잘못된 지식을 습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국어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우리 말과 글을 다듬는 일에 노력하는 시점에서,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국립기관이 우리 말과 글을 혼탁하게 하는 장본인으로 손가락질 받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본 의원실의 이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본 의원실이 수차례 전문가나 관계 기관·단체의 검토를 거치라고 조언했음에도, ‘이미 충분히 검토했다’고 자신해 온 설명문에서 수많은 오류들이 발견된 것이다.
한 예로 조선의 왕궁을 설명하는 한 패널에는 “경운궁은 원래 성종임금의 아들인 월산대군의 옛집이었는데”라는 설명이 있는데, 월산대군은 성종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 형이다. 이런 망발이 있을 수 없다. 또 광해군의 아들 질(侄)은 강화도로 유배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느 패널에서는 타살된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이 기미년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그로부터 20년 지난 1939년도 또 기미년이라 쓰여 있다. ‘조선 백자와 시’라는 패널에서는 자기에 적힌 한시를 우리 말로 적어놓았는데, 그 풀이가 수준 이하다. ‘花市風香(화시풍향)’을 ‘꽃 가게 부는 향기에’라 했는데, 이는 ‘꽃동네에 바람 향기로워’쯤으로 해야 한다는 게 한학자의 설명이다. 특히 ‘花市’를 꽃가게로 풀이한 것은 초등학교 수준으로, 만약 이를 외국어로 직역해 놓았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이밖에 단순 오·탈자나 부적합한 말 사용의 대표적 예로는 ‘바깥’을 ‘바캍’으로, ‘(생산력을) 늘리다’를 ‘(생산력을) 늘이다’로, ‘(00선생의) 문하생’을 ‘문화생’으로, 시신을 운구하는 상여의 한자 ‘喪輿’를 ‘喪與’로, ‘동아시아’를 ‘동아시’로, ‘비로소’를 ‘비로서’로, ‘본떠(본뜨다)’를 ‘본 따’로, ‘미니어처’를 ‘미니어쳐’로, 청화백자의 한자 ‘靑華白瓷’를 ‘ 靑花白瓷’로 쓴 것들을 들 수 있다. 또 중국 지명 ‘蘇州(소주)’를 ‘수조우’ ‘쑤저우’로 왔다갔다하고, ‘밀랍’이나 ‘실랍’도 ‘밀납’이나 ‘실납’으로 왔다갔다한다.
띄어쓰기는 거의 목불인견이다. ‘말들어 졌다’처럼 띄어 쓸 수 없는 어미 ‘-지다’를 띄어 쓴 곳이 여러 군데며, ‘7일 마다’처럼 조사를 띄어 쓴 곳도 부지기수다. 한 문장에서 ‘고려청자’와 ‘고려 청자’로 왔다갔다한 것 등 논란의 여지 없이 확연히 틀린 띄어쓰기가 족히 500곳은 된다.
문장부호도 전혀 통일돼 있지 않다. 각 패널마다 다르다. 어느 패널은 ‘고류지[廣隆寺]’처럼 한글과 한자 표기가 다를 경우 이를 중괄호([ ])로 나타냈는데, 다른 패널은 ‘석가모니 부처(靈山會上圖)’처럼 일반 괄호(( ))로 표시하고 있다. 한글맞춤법상의 문장부호 사용례에 따르면 전자가 옳다. 이렇듯 똑같은 상황, 똑같은 글자를 두고 문장부호를 달리 쓰고 있는 곳이 수백 곳이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내부 직원들까지 아무런 원칙 없이 자기 입맛에 따라 설명문 작업을 벌여왔다는 증거다. 만약 이와 관련한 예산이 다른 곳으로 전용됐을 경우 문책이 불가피한 사안이다.
“법령 등을 공포하는 수단하기 위한 것 등 다양하다”에서 보듯 쓰인 낱말이 너무 어려워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설명도 더러 있다. 문장이 난삽해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상당수다. 박물관을 이용하는 대상자들을 고려할 때 꼭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전부터 설명문을 쉽게 쓰도록 하겠다고 언론에 공언해 왔는데, 공염불이 된 인상이다. 그 예는 별첨에서 다룬다. 이외의 문제들도 별첨자료에서 간단히 살펴본다.
개관을 코앞에 둔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같은 ‘행정의 난맥상’은 안일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개월에 걸쳐 전문가의 자문회의를 가졌으나, 우리 말글에는 문외한인, 즉 자신의 분야에서만 전문가인 사람들에 의해 자문회의가 구성된 탓에 우리 말과 글의 표현은 엉망이 된 것이다.
설치일 지나 단 5일만에 원고지 기준 1200매의 교열 용역을 발주
본 의원실의 수차례 개선권고에 응하지 않던 국립중앙박물관은 본의원실이 단순 개선권고가 아니라 설명문에 대한 오류수정작업에 실질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지난 12일 전시유물 설명용 패널은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에, 유물설명용 패널은 국어문화운동본부에 용역을 의뢰했다. 그러나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는 이 내용을 검토한 후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확인하고, 문제의 심각성에는 동의했으나, 이를 바로잡는 일은 간단치 않아 도저히 16일까지 끝낼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뒤는게 이렇게 수정작업에 나서게 된 경위에 대해 국립박물관측은 용역을 의뢰한 패널 제작사에 윤문비와 관련해 약 3600만원 이상의 예산이 있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설치기일을 넘겼고, 특히 단 5일만에 원고지 기준 1200매의 교열 용역을 발주한 국립박물관이 과연 유수의 박물관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첨부자료>
오자와 탈자(부적합한 말 포함)
변종하 선생은 평생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이다 → 그린 서양화가였다(※작고한 분이다)
티벳박물관 → 티베트박물관
거푸집[鎔範] → [鎔范]
삿무늬[繩蓆文] → 繩席紋
능선상의 작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바캍에는 원형 또는 장타원형의 석축 성벽이 → 바깥에는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지역의 → 지안(輯安)
지안[集安] → 지안(輯安)
무령왕릉에서는 무덤 주인공과 연대를 기록한 묘지석(墓誌石)과 함께 → 지석(誌石)
농공구를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을 늘였으며 → 늘렸으며
불꽃 모양[火焰紋] → 火焰文(전체적으로 文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만 紋이어서 어색. 뜻은 같음)
대가야 小加耶, 古自國 → 소가야
소가야는 고자국(古自國)으로 불리우며 진주, 사천과 고성 반도의 남해안 일대에 위치한다 → 불리며, 위치하였다
적갈색토기[하지끼, 土師器] 등(일본)은 가야와 주변국 간의 → 하지키
덧널의 위와 옆을 냇돌로 두텁게 쌓아 덮고 → 갯돌, 두껍게
허리띠 꾸미개는 북방 유목 민족의 문화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 유례를 찾을 수 있다, 유래했다
신라토기의 장식성粧飾性 → 장식성裝飾性
금동용머리장식이나 연꽃 봉우리 모양의 → 봉오리
경상經箱 → 경상經床
금까지 기증된 많은 문화재들은 모두 전시할 수는 없지만 → 문화재들을
선생의 기증품들은 … 품격 높은 목가구들이다 → 것들이다(※앞에 목가구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기증했다는 설명이 있음)
투구甲 → 투구冑
홍산장학재단鴻山學財團 → 홍산장학재단鴻山獎學財團
그동안 헤론 박사의 차녀인 제시 엘리자베스 캐롤(Jessie Elizabeth Caroll:1888~1978)이 보관하고 있다가 그녀의 유언에 따라 1980년도에 기증하였다 → 캐럴, 기증되었다
정연수 선생의 문화생으로 입문하면서 → 문하생으로
상여喪與에 → 상여喪輿
동아시의 용무늬 → 동아시아의
망새( 尾), 곱새기와(望瓦) 등의 → 망새(鴟尾)
장엄구는 부처의 정토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서 → 것으로써
부처의 시신을 화장하여 스투파(塔婆, 塔)에 안장하였다. → 안치하였다
이 용기를 다시 금, 은, 동, 철, 돌 등의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 등
밀납으로 거울 모형 → 밀랍으로
열을 가하여 틀 구어내기 → 구워내기
이 때 밀납이 녹아 흘러나와 → 이때 밀랍이
금속을 쳐서 늘리기 → 늘이기
뜨거운 불길을 견뎌야 비로서 그 매끈한 자태를 드러내는 → 비로소
고려는 중국 원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루면서 나라 안 사정이 → 치르면서
분청사기는 세종 연간에 해당되는 약 1418~1450년경에 → 해당하는 1418~1450년경에
후기는 관요가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 자리를 잡는 1752년으로부터 민영화되는 1883년까지이다. → 1752년부터
12세기 중엽에 이르면 상감 청자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 된다
각종 동식물의 형상을 본 따 만든 → 본떠
안료가 그릇 표면에 두텁게 발라져서 → 두껍게
여기에 금을 부착시킨 청자이다 → 부착한
전남 광주 충효동 가마 → 광주 충효동 가마
아름다운 시 속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누렸던 감성과 내면 세계가 담겨있다 → 지녔다
이제 옥호(玉壺: 술병)를 만드어 주소서 → 만들어
사선서 司膳暑 →司膳署
竹溪月泠陶令醉 → 冷
대나무 숲 계곡에 → 시내에
꽃 가게 부는 향기에 → 꽃동네에 바람 향그러워(※花市風香)
세상의 정은 → 필경에 세상의 정은
홍지3년→ 홍치3년
소의 뿔로 장식하는 화각공예(華角張工藝)도 → 화각공예(華角工藝)
바다거북 등껍질(玳瑁)로 만든 → 등 껍데기[玳瑁甲]
다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중대를 한 개 돌린다 → 둘렀다, 두른다
윗 널과 위 중대 상이에 간단한 장식을 한 판(초엽)을 두른다 → 사이에
호랑이 다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명칭이 붙었다 → 하여 이런 명칭이 붙었다
나무는 무늬 결이 아름다운 → 무늿결이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적 교류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 정치·경제·문화 등과 관련한 사회적 교류가
그들이 사용하는 가구도 간결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검소하고 격조가 높은 것을 선택하였다 → 그들은
먹감나무의 무늬를 이용한 장식으로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 자연스러운
꼭 필요한 부위에만 접착제와 나무못을 이용하였다 → 사용하였다, 썼다
형태가 나비 모양의 촉으로 이어주는 방법 → 나비 모양의 촉으로 이어주는 방법
비스듬히 어긋나게 잘라서 맞춘 방법 → 맞추는
턱이 지게 어긋내어 맞춘 방법 → 맞추는
은혈자물쇠라고 한다 → 은혈자물쇠라고도
꺽쇠형 자물쇠 → 꺾쇠형 자물쇠
부위에 따라 무늬 결이 다양하나 → 무늿결이
뿌리나 옹이 부분의 나무 결이 물결모양을 이루어 → 나뭇결이
인위적으로 균열시키는 방법이다 → 균열이 생기게 하는
천장은 청靑·록綠·아청雅靑의 담담한 종이로 바르고 → 녹綠
썰어 놓은 담배 잎을 넣어 두는 합 → 담뱃잎
서류나 문방구를 놓은 낮은 가구 → 놓는
고타마 싯타르타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 가우타마 싯다르타가
먹받침(墨牀) → 먹받침(墨床)(※전체적으로 床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만 牀이어서 어색. 뜻은 같음)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폈던 시기였다 → 조선시대는
이 지방 호족에 → 이들
여래如來는 ‘진리의 체현자, 열반에 다다른 자’라는 뜻을 갖는다 → 자’를 뜻한다,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약 2,500여년 전 인도에서 → 2,500여년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 이라고도 하였다 →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해 무량수불 이라고도 하였다,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 이라고도 불렸다
질병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無知)의 병까지도 → 못하는(無知)
안석安席 → 案席
경전에는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빛을 내 무량세계無量世界를 비친다는 → 비춘다는
육계肉 → 肉髻
중생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덕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연장해
지물로는 연꽃, 법륜法輪, 여의주如意珠, 불경佛經, 무기武器 등 다양한데 → 지물은
아울러 형식화된 9세기 철불과 확연이 구별되는 것으로 → 확연히
원래 불상 전체에 두텁게 옻칠을 한 다음 → 두껍게
항마촉지이인의 수인 등에서 거의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 항마촉지인이
전체적으로 불상 표면에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 이음매가
삼산관三山冠 또는 蓮花冠이라고 불린다 → 연화관蓮花冠으로
대좌를 덮은 치마 자락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 치맛자락은
금동불은 대개 밀납蜜蠟을 이용한 실납법失蠟法이라는 → 실랍법
실납법에는 안틀을 두지 않는 → 실랍법에는
통주식은 밀랍 덩어리 자체를 조각하고 그 바깥쪽에 틀을 씌우고 가열하여 밀납을 제거한 → 밀랍을
놋쇳물을 흘러 넣는 방법이다 → 흘려 넣는
섬세한 조각을 위해 밀납을 입힌 점이 다르다 → 밀랍을
이렇게 하면 밀납이 입혀진 부분만 놋쇳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 밀랍이
그림과 사찰을 장식하는 그림도 넓은 의미의 불화라고 할 수 있다 → 의미에서
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집안集安의 → 집안輯安의, 지안(輯安)의
개경開京에만도 수십 개가 넘었다고 한다 → 있었다고
조선후기에는 많은 사찰의 재건에 힘입어 엄청난 양의 불화가 제작되고, 조선적 불화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시기이다 → 조선후기는
천도의식은 … 죽은 모든 중생을 위로하는 수륙재(水陸齋) 등도 포함된다 → 천도의식에는
약 90여점이 알려져 있다 → 약 90점이, 90여점이
신중은 부처와 보살보다는 아래 단계에 위치하고 욕계欲界인 육도六道 가운데서는 가장 위에 위치하는, 천부天部에 속하는 존재들의 모임이다 → 존재들이다
서예는 옛부터 <육예六藝>의 하나로 → 예부터
조선 왕실에는 … 이우 李俁와 같은 왕자들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조선왕실에서는
초상화를 모신 풍습은 신라 말부터 시작되었으나 → 모시는
이것을 粧䌙, 혹은 表具라고 한다 → 장황粧䌙, 혹은 표구表具
다양한 무늬가 찍혀져 있으며, → 찍혀
사람의 성씨姓氏가 적혀져 있는 경우도 있다 →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적힌 경우도 있다
소형 모방품 즉 미니어쳐(明器)들이 많이 묻힌다 → 미니어처[明器]
인양된 배몸(船體) 조각 720여 개로 복원된 → 인양한 배몸[船體] 조각 720여 개로 복원한
부처에게 받침으로써 부처와 인간이 → 바침으로써
죠몽시대(?文時代) → 繩文時代
야요이시대(?生時代) → 彌生時代
나무 잎을 발견하게 된다. → 나뭇잎
우우는 이 나무 잎을 품고 → 나뭇잎
“내부(內)”과 “외부(外)”를 구분한다 → ‘내부(內)’와 ‘외부(外)’를 구분한다
마키에(蒔?) → 마키에(蒔繪)
일생에 단 한번의 만남(一期一? → )일생에 단 한번의 만남(一期一會)
새로운 에도문화를 전개되어 → 에도문화가
조몽시대에는 풍부한 자연의 혜택을 바탕으로 역동力動적인 문화가 발전한 시기이다. → 조몽시대는
야요이시대에는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청동이나 쇠로된 도구를 사용하는 시기이다. → 야요이시대는
고훈시대에는 사다리꼴과 둥근꼴이 합쳐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 만들어졌다
일본의 염직과 공예의 소재를 회화에 도입한 림파(琳派) → 임파
다색 판화인 우끼요에(浮世繪) 등 → 우키요에(浮世繪)
청화백자靑花白瓷 → 청화백자靑華白瓷
유리홍釉里紅 → 유리홍釉裏紅(2곳)
수조우(蘇州) → 쑤저우(蘇州)
높은 온도에서 구어 내는 제작법이 → 구워
정성스런 마음으로 → 정성스러운
차츰 고기와 곡식을 담은 그릇, 무기, 악기 등으로 만들면서 → 담는
그 목적은 길吉한 것을 쫓고 → 좇고, 따르고
경희궁慶熙宮, 처음 이름은 경덕궁慶德宮, 경덕궁경운궁慶運宮이다 → 경희궁慶熙宮(처음 이름은 경덕궁慶德宮),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은 원래 성종임금의 아들인 월산대군의 옛집이었는데 → 형님인
태조임금이 상왕 때 머문 풍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는 → 비롯해
구려와 백제의 시조始祖廟 또는 동명묘東明廟 → 시조묘始祖廟
익위사翊衛司에서 호위를 맡겼다 → 익위사翊衛司에
왕이 머문 곳은 주필駐 , 주필대駐 臺라 표시하여 → 주필駐蹕, 駐蹕臺
청자(국보 제 94호)와 시책諡冊 그 대표적 사례이다 → 시책諡冊이
당저當 등으로 → 당저當宁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라는 우수한 세계지도를 → 混一疆理(2곳)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地圖등이 대표적이다 → 之
곧 100리里를 1자(尺)로, 10리를 1치(寸) 리로 → 1치(寸)로
다른 세계와의 교류 관계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 것이다(※이곳만 존댓말이 썼음)
400~500여 → 400~500
역사관을 새로 열었읍니다 → 열었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한다 → 합니다(※여기서만 반말을 썼음)
작은 죄를 진 경우에는 →지은
보부상의 장례 행렬에던 깃발 → 행렬에 쓰던
원석탁본은 1887년부터는 제작되었다 → 1887년부터는
기미년[1939] → 기묘년
영창대군의 명예가 회복작업이 시작되었으며 → 명예
법흥왕 등 신라 6부의 수장首將들이 모여 → 때(법흥왕 때’라고 해야. 법흥왕은 신라 6부의 수장이 아님)
세상을 떠나났다 → 떠났다
비문과 악문
비문과 악문을 일일이 다 적고 논하자면 열흘이 걸려도 부족할 듯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역사관에서 나타나는 것 중에서 조금 심각한 것만을 정리했다. 문장 중의 파란색 글씨는 필요한 설명을 달아놓은 것이다.
1.광개토왕비의 내용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은 크게 서문과 본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문에서는(빼야) 서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서 광개토왕에 이르기까지의 계승(→계승 내력), 비를 세우는 목적 등이 쓰여 있다. ①본문은 다시 광개토왕대의 연대기 부분과 능묘를 지키는 법령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②본문 앞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을 연대기로 기록하고 있으며, 뒷 부분에서는 고구려왕들의 능묘를 지키는 법령을 규정하고 있다.
*①과 ②의 내용이 크게 중복됨. 글의 흐름상 ②는 ①의 내용을 보충설명하는 글이 되어야 하지만, 뒷부분에서 ‘능묘를 지키는 법령’이라는 서술부분이 겹치는 점으로 보더라도 보충설명이라기보다는 중언부언이라는 느낌이 강함. 보충설명하는 글이 되려면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좋음. “연대기에는 백제와 만주 지역 정벌, 그리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왜를 토멸한 내용이 담겨 있고, 능묘관리 법령에는 묘를 돌보는 사람[守墓人]의 숫자와 차출 방식, 그들에 대한 매매 금지 등의 규정이 적혀 있다.”
2.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는 광개토왕(재위 391년~412년)의 치적을 기록하고 이를 찬양한 비석이다. 광개토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다. 중국 동북지방, 현재의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吉林省集安縣太王鄕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국내성國內城이다.
* “이곳은~국내성이다”는 오류. 이곳(광개토왕비가 있는 자리)이 만약 국내성 안에 있다면 “이곳은 국내성 안에 있다” 정도로 해야 됨. 그러나 이곳은 엄밀히 말해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음. 따라서 “이곳은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다” 정도가 무난함.
광개토왕비는 높이 6.39m의 기둥모양을 하고 있으며, 응회암으로 된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여 네 면에 글을 새겼다. 동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각 면의 폭은 1.35m에서 2m이다. 전체가 약 30톤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돌이 화강암의 받침대[대좌:臺座]에 얹혀져 있다. ①크기 11~15cm나 되는 큰 글자가 칸과 줄을 맞추어 나란하게 모두 1775자가 새겨졌다. 예서 隸書라고 하는 고졸한 서체로 쓰여 있다. ②중후한 한문漢文을 기본으로 하면서, 독특한 고구려적 수사법도 구사되고 있다. ③광개토왕비는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광개토왕대의 정복사업을 중심으로 한 치적을 다음 왕인 장수왕長壽王대에 세운 것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금석문이다.
① ‘글자가~1775자가 새겨져 있다’에서 주격조사 ‘가’가 두 번 겹쳐 어색. 이 부분은 “글자 크기는 11~15cm 정도이며, 칸과 줄을 맞추어 나란하게 모두 1775자가 새겨졌다”라고 하는 게 좋음. 글자 숫자도 일각에서는 1800자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확인할 필요가 있음.
② ‘한문을 기본으로 한다’는 표현에는 다른 글자도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담겨 있음. 그러나 전체가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표현을 달리 해야 함.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고문 문체로 쓰여졌으며, 간간이 고구려적 수사법도 구사되었다.” 정도가 무난.
③ 이 부분은 첫머리 ㉮와 내용이 중복됨. 사족.
4. 광개토왕비의 탁본
광개토왕비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다. ①이끼가 낀 채로 오래도록 황야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880년에 중국 청淸나라 성경성盛京省의 어떤 관리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다. 광개토왕비 탁본이 시작된 것은 이듬해인 1881년부터였다. 고증학이 발달했던 19세기말부터 광개토왕비 탁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좀더 많은 탁본을 쉽게 뜨기 위한 여러 방법이 고안되었다. 비면에 석회를 발라 뜨는 방법, 아예 붓으로 탁본을 그리다시피 하는 방법 등도 사용되었다.
① ‘방치되어 있던 것을~관리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어법에 맞지 않음. ‘방치되었던 것을 관리가 발견하였다’라고 해야.
5. 역사 속의 금석문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은,청동,철과 같은 금속재료나 돌에 새긴 글을 일컫는다. 재질에 따라 크게 금속재료의 금문金文과 돌 재질의 석문石文으로 나뉜다. ①금문에는 글이 주조된 종鍾이나 불상, 칼, 허리띠, 그릇, 수저와 인장印章들이 있다. ②석문에는 돌로 만든 비석이나 묘지석, 석각石刻 등이 있다. 넓은 의미의 금석문은 금속이나 돌 재질 뿐만 아니라, 흙이나 나무 등의 소재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① ‘금문에는 수저, 인장이 있다’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 ‘금문에는’으로 시작되는 글을 만들려면 ‘금문에는 종정문, 불상문, 인장문 등이 있다’처럼 뒤에 금문의 종류를 나열해야 함. 따라서 이 글은 ‘금문은 종이나 불상, 칼, ~등에 새겼고’라는 흐름으로 만들어야 함. ②도 마찬가지로 석문은 ~등에 새겼다‘ 정도가 자연스러운 흐름.
금석문은 견고한 재질로 만들어 졌으며, 시각적이어서 시간을 초월하여 후대에 까지(붙여야) 또(‘또’ 는 불필요한 말)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서, 초창기 금석문은 통치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만들어졌다. 제작 그 자체가 어떤 사실을 널리 알리거나 기념하기 위한 것이어서, 이를 제작하고 건립할 수 있는 ①것은 문자 구사 능력과 막대한 제작경비를 감당할 수 있는 ②고위권력이었다.
①과 ②는 단어 선택이 부적절함. ‘것’은 무생물을 지칭하는 단어임. 본문의 흐름을 보자면 이곳에는 무생물이 아닌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를 넣어야 함. 따라서 본문은 “이를 제작하고 건립할 수 있는 계층은~고위권력자들이었다” 정도가 무난.
시대가 내려오면서 문자 이해의 확대, 문화의 발달, 사회 전반적인 경제력의 발전 등과 맞물려, ①금석문은 왕이나 왕실 등에 그치지 않고 귀족, 승려, 성리학을 비롯한 유학자 등으로 확대를 보이게 된다.특히 중세에 귀족 및 불교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귀족 관료와 승려를 중심으로 ②금석문조성하을 조성하게 된다. ③근세에 들어와서는 유교문화의 발달과 함께, 금석문은 선비와 양반을 중심으로 지방의 고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아지면서, 간략화되어 가며,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① ‘금석문은 ~유학자 등으로 확대를 보이게 된다’는 주술간 의미 호응이 안 됨. ‘금석문의 기록 주체는 ~유학자 등으로 확대된다’가 무난.
② 교정 작업이 이뤄지지 않음.
③ 연관성이 부족한 정보들을 한 문장에 구겨넣다 보니 글이 늘어지고 산만함. 두 문장으로 가르는 게 자연스러움. “근세에 들어 유교문화가 발달하자, 금석문은 선비와 양반을 중심으로 지방의 고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기록물의 크기가 작아지고, 내용이 간략해지는 대신, 그 종류는 다양해졌다.” 정도가 무난.
당대 예술의 복합체이기도 한 금석문은 오늘날 ①우리에게 옛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자료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① ‘우리에게’에 이어지는 호응어가 없음. 빼는 게 더 자연스러움.
7. 탁본
①금석문은 쉽게 옆에 두고 보기 어려웠다. ②세워진 거대한 비석을 보려면 매번 그 곳에 가야 했다. ③귀중한 재질로 만들어진 금석문 역시 쉽사리 자주 볼 수 없었다. 또 이들 금석문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기도 쉽지 않았다. 고증학이 발달하면서 금석,서예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높아지자) 위와(→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탁본이란 방법이 고안되었다. 특히 사진이 없었던 그 시절에 탁본은 금석문의 글자를 있는 그대로 베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①의 ‘쉽게 ~하기 어려웠다’는 논리적으로 적절치 않은 표현. ‘쉽게 ~할 수 없었다’ 라고 하거나 ‘~하기가 쉽지 않았다’거나 아예 ‘쉽게’를 빼거나 해야.
②와 ③은 ①을 보충 설명하는 글로서, 내용상으로 볼 때 대등한 형식의 문장이 되어야 한다. 즉 금석문의 재료로 쓰인 돌(비석)과 금속의 특징을 각각 설명하고자 했는데, ②에서 비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③에서는 금속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의 ③을 보면 금속이 아니라 ‘금석문’을 설명하고 있다. 또 ②에서는 ①의 ‘옆에 두고 보기 어려운 이유’로 ‘비석의 운반상의 어려움’을 들었으므로 ③에서는 ‘금속의 확보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들어야 하는데 ①의 ‘옆에 두고 보기 어려움’을 다시 한번 지적함으로써 논지 전개가 흐트러짐. 따라서 ③은 “(글이 새겨진) 금속물도 크기는 작지만 귀중하게 취급된 물건이었으므로 수중에 넣기가 만만치 않았다.” 정도가 무난.
①비록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적외선카메라를 비롯한 고성능 장비로 인해 탁본은 그 역할을 사진등 영상물에게 물려주고 있지만, 여전히 탁본 나름의 ②시각적 역할을 통해 금석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 ‘과학의 발달로~고성능 장비로 인해’는 잘못된 짜임.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격조사 ‘~로’는 ‘~로 ~하다’의 꼴을 필요로 한다. 본문 같은 ‘~로 ~로’꼴은 문법적으로 불안정하다. 또 ‘고성능 장비로 인해 탁본은 그 역할을 ~물려줬다’에서 ‘물려줬다’는 상황에 적합한 단어가 아니다. ‘빼앗겼다’가 적합하다. 또, ‘영상물에게’는 ‘영상물에’라고 해야한다. 무생물에는 ‘에게’를 쓸 수 없다.
② ‘시각적 역할을 통해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미상 호응이 안 된다. ‘탁본 나름의 시각적 장점이 있어~’라고 해야. 이 글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자연스럽다.
“오늘날 적외선 카메라를 비롯한 고성능 장비가 등장하면서 탁본의 역할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나름의 시각적 장점 때문에 탁본은 아직도 금석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10. 금석학자 김정희 새김글
①기미년[1939] 8월. 이제현. 용인 사람.
②정축년[1937] 6월 8일 김정희·조인영이 와서 조사하고 남은 자 68자를 정하였다.
김정희가 이 순수비를 조사하고 새긴 글. 김정희는 두 차례나 직접 이 비를 조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북한산순수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정희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이다.
①기미년은 기묘년의 잘못. 1939년이면 현대에 속하므로 굳이 간지를 넣을 필요가 없음.
②글이 꼬여서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됨. 이 문장 자체로 보면 ‘(1800년대 사람인) 김정희, 조인영이 1937년에 68자를 정했다’는 뜻으로 읽혀 시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1800년대에 김정희, 조인영이 조사하고 난 뒤 용인사람 이제현이 남은 글자를 1939년에 정했다는 취지의 글인 듯한데, 그렇다면 좀더 친절히 설명해야. ‘정하였다’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음. 쉬운 용어로 바꿔야. ‘조사하고 남은 자 68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음.
13. 금문
금석문은 금문과 석문으로 이루어진다. ①비와 묘지 등 돌로 만들어진 것을 석문石文이라 하고, 금속재질로 만들어진 것을 금문金文이라 한다. ②금문은 글자가 새겨진 사리함, 불상, 종, 그릇 등으로 그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정우6년貞祐六年'의 글자가 새겨진 청동북(어디서 발견된 무슨 청동북인지 설명해 줘야)은 사원에서 사람을 불러 모을 때 사용되었는데, 평안을 기원하는 간절한 바램(→바람. 혹은 소망으로 써도 됨) 이 새겨졌다(→담겨 있다). 쇠로 만든 동종이나 청동향완(→香椀이라고 한자를 넣어줄 필요가 있음.)에는 제작한 사람들을(→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 또 금속으로 만든 그릇, 수저나 금속제 허리띠 등에도 글자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몇 자 되지 않는 ③글자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바램(→바람. 혹은 소망) 등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①설명이 정확하지 않다. ‘돌로 만들어진 것’은 ‘돌에 새긴 것’으로 해야 하고,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것’은 ‘금속 재질에 새긴 것’이라고 해야 한다.
②사리함, 불상, 종, 그릇 등은 금문이 아니라 금문이 새겨진 대상물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금문이 새겨진 대상물은 사리함, 불상, 종 그릇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라고 하거나 ‘금문은 사리함, 불상, 종, 그릇 등 다양한 곳에 새겼다’라고 해야 한다.
③‘글자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글자를 통하여~엿볼 수 있다’가 더 적확한 표현.
16. 고려 문벌귀족의 정점,이자연
①고려는 특권신분층인 소수의 문벌귀족가문이 정부의 요직을 점유하고 국가를 운영해간 귀족사회이며, 그 대표적인 가문이 경원慶源[인천]이씨이며, 그 정점에 이자연李子淵(→이자연이) 있었다. 이자연은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지냈고), 그의 집안은 10여대에 걸쳐 5명의 수상首相과 20명에 가까운 재상宰相을 배출하였다. 당시에 이들을 "고려에서 제일가는 가문[해동갑족海東甲族]"이라 부를 정도였다.
①은 내용 면에서 대등적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며 ~이며’로 연결해서는 안된다. ‘귀족사회이며’는 ‘귀족사회로서’라고 하는 게 좋다.
17. 목놓아 울어버린 어머니 마음 수녕옹주 묘지석
항전을 계속해오던 ①고려는 1260년에 중국 원元나라와 화의를 맺고 양국간에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서로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고려의 여성들이 '공녀貢女'로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② 수녕옹주의 딸도 공녀로 뽑혀 이역만리로 떠나게 되었는데(→뒷문장을 보면 ‘떠났는데’가 적절), 외동딸을 보낸 어머니 수녕옹주의 마음은 그리 편치 못하였다. ③울다 지쳐 병이 든 어머니는 결국 몸져 눕고, 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딸을 ③애타게 사랑하던 어머니 마음이 그녀의 묘지명에 고스란히 베어있다(→배어 있다).
제목에서, ‘목놓아 울어버린 어머니 마음’은 논리 모순. 시적인 표현이 아닌 이상 ‘어머니 마음’은 ‘목 놓아 울’ 수 없다. 뒤에 이어지는 ‘수녕옹주 묘지석’과도 의미상 호응이 되지 않는다. 그냥 ‘목 놓아 울어버린 어머니’ 정도가 무난하다.
①의 ‘고려는 ~양국간에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다’도 주어와 술어간 호응이 안된다. ‘양국간에’를 빼고 보면 자연스럽다. 다음 문장 앞머리 ‘서로’를 ‘양국간에’로 고치면 앞뒤 문장간의 연결도 자연스럽다.
②에서, 공녀로 뽑힌 외동딸을 이역만리로 보내는 마음을 ‘그리 편치 못하였다’로 표현하는 건 정서상 안 맞는다. ‘편할 리가 없었다’ 혹은 ‘찢어지는 듯했다’ 정도로 해야.
③‘울다 지쳐 병이 든 어머니는 결국 몸져 눕고’에서 병이 든 것과 몸져 누운 것은 동일한 의미. 즉 ‘병이 들어서 병이 들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울다 지친 어머니는 결국 몸져 눕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④ ‘애타게 사랑하다’는 당혹스런 표현. 딸이 이역만리에 있다면 애타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애타게 그리워할 것이다.
19. 풍수지리와 묘
풍수지리風水地理사상이란 바람,물,땅의 세 요소를 인간의 삶에 조화시키는 논리이다. 이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땅에 관한 이치를 체계화한 것이며, 사신도四神圖로 대변되는 천문사상이 덧붙여(→덧붙여져) 구체적인 이론으로 탄생되었다. 그 목적은 길吉한 것을 쫓고, 흉凶한 것을 피하여, 잘 살기 위한 것이다. ①집자리나 묘를 쓸 때 (→이 다음에 ‘이러한 풍수지리에 근거하여’를 첨가하는 게 좋겠다) 입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②예전부터 좋은 곳을 택하여 조상의 묘지를 쓰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믿었다.
고려나 조선개국 때에 도성을 자리잡는데에는 유명한 풍수가가 관여하였다. 이처럼 생활속의 집자리는 물론, 죽은 이의 묏자리에도 풍수사상이 기능하였다. ③조상의 묘자리를 잘 쓰면, 자손이 부귀하게 되고 번창한다고 생각하였다.
① 목적어 ‘집자리’와 ‘묘’가 서술어 ‘쓰다’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집자리’는 ‘쓰다’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목적어의 격을 일치시킨다는 차원에서 ‘묘’는 ‘집자리’에 맞춰 ‘묏자리’로 하는 게 좋다. “집을 짓거나 묘를 쓸 때”라고 하면 무난하다.
②와 ③은 같은 내용. 하나를 빼야.
22. 영창대군 계보도
광해군은 즉위한 해에 친형을 죽이고, 5년뒤에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①광해군을 물리치고 인조가 즉위하자, 먼저 광해군의 아들인 세자 질侄을 폐위하고 죽였다.
① ‘(광해군을) 물리쳤다’는 적절치 않은 표현. ‘(광해군을) 몰아냈다’ 혹은 ‘(광해군이) 쫓겨났다’가 적절. 또 본문에서는 인조가 즉위하자 세자 질(侄)을 죽였다고 했는데 세자 질은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면서 광해군의 아들인 세자 질도 폐위되었다. 폐세자 질은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도가 무난.
23.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영창대군 묘지석
①선조宣祖에게는 여러 명의 왕자들이 있었고 각각의 후원세력이 있었다. 이들간에 왕위계승을 놓고 알력이 있었는데, 1608년 선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②여러 명의 아들 중 광해군光海君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집권 후, 왕위를 유지하는데 위협이 되는 형제를 살해하였니, 영창대군도 이 과정에서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1614(광해군 6)(→1614년(광해군 6년)년 어린 8세의 나이로(→8세의 어린 나이에) 살해당하였다.
①글 쓴 의도는 ‘여러 명의 왕자들에게 각각의 후원세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문맥이 어그러져 ‘선조에게 각각의 후원세력이 있었다’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선조에게는 여러 명의 왕자들이 있었고, 그 왕자들에게는 각각의 후원세력이 있었다.”라고 해야. 하지만 ‘각각의 후원세력이 있었다“는 본문의 흐름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족이므로 빼는 게 좋다.
②아들이 여러명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혔으므로 또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냥 ‘둘째 아들’이라고 하면 된다.
띄어쓰기
크기 까지(외 다수)
정교해 졌으나(외 다수)
세종 때 부터(외 다수)
따위 예에서 보듯 절대 띄어 쓸 수 없는 어미나 조사를 띄어 쓴 곳이 수두룩함.
기타
▲중국 지명 중 ‘지안’의 한자 표기를 ‘輯安’과 ‘集安’ 두 가지를 쓰고 있음. 옛날에는 ‘輯安’을 썼으나 중국이 한자 표기를 간소화하면서 현지에서 지금은 ‘集安’으로 쓰고 있음. 그러나 국립국어원에는 ‘輯安’을 올려놓고 있음. 아무튼 패널마다 ‘지안(輯安)’ ‘지안(集安)’으로 달리 쓰는 것은 관객들에게 다른 지명인 것처럼 비칠 수 있음. 부득이하다면 지안(輯安/集安)으로 쓰는 것도 요령임.
▲불필요하게 피동사를 만드는 ‘-지다’와 사동사를 만드는 ‘-시키다’ 남발.
▲“법령 등을 공포하는 ‘수단’하기 위한 것 등 다양하다”에서 보듯 난해한 표현 곳곳에
▲과거 한자로 쓰던 말들을 일부 우리말로 순화하는 과정에서 어법 등을 무시해 한자말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말도 많음. 부장품(副葬品)을 ‘껴묻거리’로 한 것도 그런 예 중 하나인데, 우리말에서 ‘-거리’는 명사 뒤에나 붙지, 동사 어간에는 붙지 못함. 낱말도 무척 생소함. 옹관묘를 ‘독널무덤’이라 적고 있는데, ‘독널’은 우리말에는 없고, 대신 북한의 문화어(표준어)임. 한자어를 순화한 말의 경우 대부분 사전에 없는 말이어서 관람객의 혼돈만 가중시킬 우려가 있음.
웹사이트: http://www.bdmin.net
연락처
민병두의원실 02-788-2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