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潢玹) 선생(1855. 12. 11 ∼ 1910. 9. 10)
매천 황현 선생은 조선초의 명재상인 장수 황씨 황희 정승 가문의 후예로, 1855년 12월 전라남도 광양군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 선생과 어머니 풍천 노씨의 큰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높은 소질을 보인 선생은 20대에 서울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선생, 창강 김택영 선생 등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사귀며 학문· 사상적으로 성장하였고 뛰어난 글솜씨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한 선생은 34세 때인 1888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한 정치현실을 개탄하며 정치인을 ‘귀신같은 나라의 정신나간 사람(鬼國狂人)’이라 질타하고 구례 만수동의 지리산 자락에서 학문과 교육활동에 매진하였다.
그 후 개인적인 경험과 수집한 각종 정보를 토대로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저술활동을 펼치며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을 남겼다. 시간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하는 동시에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선생의 저작들은 내용이 풍부하고 문장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선생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비평이 특징이다. 또한 당시 급변하는 구한말의 정세를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저술하여 역사자료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김택영 등과 함께 중국망명을 시도하기도 한 선생은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며〈문변삼수(聞變三首)〉를 짓고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순국한 민영환 등을 애도하며〈오애시(五哀詩)〉를 짓는 등 국운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한편 교육에도 관심을 보여 1908년에 근대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호양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결국 국권이 피탈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느끼고 절명시 4수를 남긴 후 자결·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매천 황현 선생 공적내용 요약
○ 1889 〈언사소(言事疏)〉를 올려 국정개혁을 주장
○ 1905 을사늑약을 분개하는 애국시 발표
○ 1910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자결·순국
○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독립기념관 개요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민이 즐겨찾는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이라는 경영비전을 설정하고 국민에게 친근하고 사랑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이용환경을 개선하고 있다. 국민이 즐겨찾는 기관, 고객 눈높이에 맞는 핵심사업 활성화를 통해 이용자 중심의 나라사랑 정신함양의 중심기관을 지향하며,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설립근거 : 독립기념관법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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