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맨츠 & 잉글리시 콘서트, 역사적 한국 초연

성남--(뉴스와이어)--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고음악을 작곡 당대 악기와 편제, 연주방식으로 복원하는 정격연주(원전연주, authentic performance)의 최고 바이올리니스트 앤드류 맨츠, 그가 음악감독을 맡아 이끄는 세계 최정상 실내악단 잉글리시 콘서트가 성남아트센터 2월 무대를 빛낸다.

발레 <신데렐라>, 오페라 <파우스트>,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말러 스페셜리스트 길버트 카플란의 한국 데뷔, 블루오션 서커스 <디아볼로> 한국 초연…. 화제의 개관공연으로 2005년 한국 공연예술계의 지형도를 바꾼 성남아트센터가 2006년 음악애호가들에게 바치는 빅카드 1탄!

<프로그램>

Bach Family - A Musical Dynasty
W.F.Bach _ Sinfonia in F
C.P.E.Bach _ Orchestersinfonie No.3 in F wq 183/3
C.P.E.Bach _ Cello Concerto in A Wq 172
J.S.Bach _ Overture (Suite) No.s in b minor BWV 1067
C.P.E.Bach _ Orchestersinfonie no.1 in D wq 183/1

및 장소 : 2006년 2월 11일 오후 6시 /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티켓 가격 : VIP석 12만원/ R석 10만원/ S석 8만원/ 청소년석 3만원
문의 : 031-783-8000 성남아트센터 www.snart.or.kr

● 앤드류 맨츠와 잉글리시 콘서트

/이종선

당시의 악기들과 주법을 이용하여 옛 음악을 보다 원형에 가깝게 재현하고자 시도했던 일부 음악학자들의 학문적 호기심에서 출발한 시대악기연주(또는 원전연주)는 1980년대 이후 보다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하면서 또 하나의 클래식 음악 내의 독립된 영역으로 완전히 일반화되었다. 음악박물관 진열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악기들이 무대 전면에 재등장하였고, 세월의 먼지 속에 잊혀졌던 수많은 작곡가들과 작품들이 다시금 새 생명을 얻었다.

활모양으로 휘어진 궁형 활과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현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바이올린 역시 시대악기연주의 붐과 더불어 여러 스타플레이어들을 양산하였다. 얍 슈뢰더, 지기스발트 쿠이켄, 모니카 휴젯, 사이먼 스탠디지, 라인하르트 괴벨, 존 홀로웨이 등의 이 바닥의 초석을 확고히 다진 원로급 연주자들로부터 파비오 비욘디, 줄리아노 카르미뇰라, 엔리코 오노프리 등의 최근 크게 각광받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 연주자들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기량과 저마다의 차별화된 개성을 확보한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시대악기 연주계를 뜨겁게 달구어왔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름이 있으니, 바로 앤드류 맨츠다. 영국을 대표하는 이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는 1965년에 태어났다. 젊어서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아버지 덕분에 집 한 쪽 구석에 놓여있던 바이올린이 어린 맨츠에게 좋은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그때부터 바이올린과 가까이 지냈으나 어디까지나 취미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다. 대신 그의 관심을 끌었던 악기는 리코더였다.

10살 무렵 누군가가 맨츠에게 장난감 같은 리코더 말고 악기다운 악기를 연주해볼 것을 권했고, 그가 선택한 것은 역시 바이올린이 아닌 오보에였다. 하지만 오보에 연주자의 꿈은 치과의사의 반대로 이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치열교정 중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바이올린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맨츠는 이때부터 체계적인 레슨을 통해 본격적인 연주가의 길로 들어선다. 11살부터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었고, 14세 때는 첫 해외 연주여행 경험도 가졌다.

명문 케임브리지로 진학하면서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였으나, 바이올린 연주 또한 멈추지 않았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일생의 중요한 음악동료를 만났다. 맨츠의 손에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바로크 바이올린을 쥐어준 이는 친구 리처드 에거였다. 이제 막 하프시코드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던 에거는 맨츠와 더불어 바로크 앙상블을 만들길 원했고, 이 때부터 시작된 두 젊은이의 우정어린 파트너십은 각자가 영국을 대표하는 두 바로크 스페셜리스트들로 성장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굳건히 이어져오고 있다.

이후 그는 런던의 영국왕립음악원과 헤이그의 네덜란드왕립음악원에서 심도 있는 음악수련과정을 거쳤다. 그의 스승은 영국 원전연주계의 중요한 선구자였던 사이먼 스탠디지였다. 잉글리시 콘서트의 악장이었던 그는 지휘자 트레버 피노크와 함께 완성했던 수많은 명반들로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스승은 하프시코드 거장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의 부인이자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인 마리 레온하르트였다. 훌륭한 스승들의 지도를 통해 맨츠의 재능은 한결 원숙해져갔고, 옛 음악들에 대한 이론적인 기반 역시 더욱 탄탄해졌다.

1988년 그는 네덜란드 고음악계의 거물이자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톤 코프만을 만난다. 맨츠의 우수한 재능을 알아본 코프만은 1989년 그를 자신의 악단의 리더로 초빙하였고, 이때부터 시대악기 연주계에서 앤드류 맨츠의 화려한 캐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맨츠를 대표하는 음반으로 비발디의 사계(Erato)가 있다.

1993년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돌아온 맨츠는 나이젤 노스(류트)와 존 톨(하프시코드)과 더불어 바로크 삼중주단 로마네스크를 결성하여 잊혀진 바로크 작곡가들의 실내악 레퍼토리들을 꾸준히 발굴하였다. 이들은 하모니아 문디 프랑스(이하 HMF)와 계약을 맺고 다수의 음반들을 완성하였고, 그중 비버의 1681년 소나타(그라모폰상, 에디슨상, 칸느 클래식상 수상작)와 슈멜처의 ‘우나룸 피디움’(디아파송 금상, 독일비평가협회상, CHOC상 수상), 우첼리니의 바이올린소나타(클래시카 추천반, 골드베르크 만점)는 이 시기의 맨츠를 대표하는 명반들이다.

1996년 맨츠는 고음악 아카데미(The Academy of Ancient Music 이하 AAM)의 협력음악감독(Associate Director) 겸 악장으로 취임하면서 영국 고음악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73년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설립한 시대악기연주단체인 AAM은 원전연주의 붐을 이끌었던 80년대 영국 고음악계의 상징이었다. 호그우드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 다소 약해진 자신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AAM이 선택했던 비장의 무기가 바로 앤드류 맨츠였던 것이다.

AAM은 맨츠와 HMF와의 긴밀한 협력관계에 힘입어 다시금 활발한 레코딩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고, 지금도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바흐의 바이올린협주곡, 비발디의 폴란드 왕을 위한 협주곡(CHOC상 수상작), 헨델의 합주협주곡(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 제미니아니의 합주협주곡(에디슨상 수상작)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AAM의 제2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AAM과의 협력 작업을 통해 맨츠는 단순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위치를 넘어서서 악단 전체를 이끄는 지휘자로서의 캐리어까지도 탄탄하게 다져나갈 수 있었다.

2003년 맨츠의 캐리어에 또 한번의 큰 변화가 생겨났다. AAM과 더불어 80년대 영국 원전연주계의 자웅을 겨루었던 잉글리시 콘서트의 제2대 음악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AAM이 설립되던 바로 그해에 명 하프시코드 연주자 트레버 피노크가 바이올리니스트 사이먼 스탠디지와 의기투합하여 결성하였던 잉글리시 콘서트는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세계 최고수준의 시대악기 오케스트라로 군림해오고 있는 또 하나의 영국 음악계의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다.

이 악단은 피노크가 이끌던 시절 아르히프 프로덕션을 통해 수많은 명반들을 양산하면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독주자로서의 활동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 이 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피노크는 특별히 맨츠에게 자신의 후임을 맡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이로써 맨츠는 영국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시대악기 연주 단체 둘을 번갈아 통솔하게 되는 전인미답의 경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악단은 바뀌었으나 HMF와의 협력관계는 변함없이 지속되었고, 잉글리시 콘서트 역시 HMF의 새로운 식구로서 활발한 녹음활동을 진행 중이다.

이들의 HMF에서의 첫 음반은 모차르트의 유명한 ‘소야곡’(Eine Kleine Nachtmusik)(Classicstoday 만점, Classica 추천반), 맨츠의 관심사가 바로크 시대의 울타리를 넘어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들의 가장 최근 음반이었던 비버의 미사 ‘부활하신 그리스도’(Missa Christi resurgentis) 역시 그동안 고집해왔던 순수기악곡에서 종교합창곡으로 맨츠의 관심사가 보다 확장되었음을 보여준 음반이다.

최근의 두 음반이 암시하듯 맨츠의 음악적 야심은 커져만 가고 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교향곡이나 헨델(메시아, 알렉산더의 향연)과 바흐(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마태수난곡)의 대작들을 콘서트 레퍼토리로 선택하였고,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런던 필하모닉 등의 정상급 정규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 아르농쿠르, 가디너 그리고 헤레베헤가 걸어갔던 마에스트로를 향한 여정이 설계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보다 다양한 방면에서 바쁜 활동을 펼쳐갈 것이 자명하지만, 바로크 음악에 대한 그의 굳은 사랑과 열정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해의 서두를 맨츠와 잉글리스 콘서트의 연주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의 바로크 애호가들에게 분명 큰 행운일 것이다. 이들이 내한공연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레퍼토리는 바흐 패밀리의 관현악작품들. 특히 바흐의 두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와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신포니아들은 이제껏 맨츠가 음반으로 선보이지 않았던 레퍼토리들이기에 이번 공연에 더욱 관심이 간다.

바흐의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1710-1784)은 아버지의 큰 기대 속에서 체계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인벤션과 신포니아’, ‘평균율’ 등의 모체가 되었던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은 바로 자신의 첫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바흐가 정성껏 준비했던 음악교재들이었던 것이다. 장성 후에는 드레스덴을 주무대로 활동하면서 신포니아, 칸타타, 건반작품 등을 다수 남겼으나, 방탕한 성격 때문에 주위의 환영을 받지 못한 채 빈곤 속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번 연주회 레퍼토리인 신포니아 F 장조는 그가 남긴 아홉 곡의 신포니아 중 하나로, 바로크와 전기고전양식이 절충 된 전형적인 18세기 교향곡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전교향곡과 유사한 4악장 구성의 작품이나, 마지막 악장에 배치된 메뉴엣 악장은 과거 바로크시대의 춤곡 모음곡의 그림자가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카를 필립 엠마누엘(1714-1788)은 빌헬름 프리데만의 바로 밑 남동생으로 태어났다. 그 역시 부친의 음악적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나, 왼손잡이라는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연주자로는 대성하지 못했다. 타고난 재능은 형만 못했으나, 노력을 통해서 결국은 바흐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음악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음악애호가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작곡가로 활약하면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특히 아버지를 왕에게 소개하여 ‘음악의 헌정’을 작곡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곡의 신포니아를 작곡하였는데, 그중 두 작품(Wq.183-1, Wq183-3)이 이번 공연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카를 필립 엠마누엘은 아버지와 헨델로 대변되던 바로크시대와 모차르트, 하이든의 고전시대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교향곡들 역시 바로크 시대의 서곡(관현악 모음곡)과 이후 시대의 교향곡의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크시대의 서곡들에서 유래된 급-완-급의 3악장 구조의 외형이나, 호모포닉한 선율의 처리나 틀에 잡힌 악곡 구조 등은 고전시대의 도래를 예견한다.

아버지 바흐의 대중적인 인기작 둘도 포함되었다. 먼저 바이올린협주곡 BWV1041. 바흐가 우수한 기악곡들을 양산하던 시기인 괴텐시대(1717-1723)에 완성된 작품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토렐리가 확립한 독주협주곡의 전형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하프시코드협주곡 BWV1058은 이 작품을 편곡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현악모음곡 2번 BWV1067. 여러 종류의 춤곡을 엮은 전형적인 바로크 춤곡 모음곡의 외형을 갖추었으나, 전곡에 걸쳐서 플루트가 독주악기수준의 맹활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협주곡으로의 특징 또한 겸비한 독특한 성격의 작품이다. 특히 폴로네이즈, 메뉴엣, 바디네리로 이어지는 마지막 세 악장은 바흐의 수많은 명곡들 중에서도 특히 귀에 익은 친숙한 선율들이다.

● 앤드류 맨츠 - 디스코그래피

/이재준

1980년대 CD의 등장과 더불어 원전연주의 주도권은 유럽 대륙으로부터 영국으로 넘어왔다. 지휘자 호그우드, 가디너, 피노크가 주도한 영국의 위세를 평자들은 원전 연주의 ‘제2의 물결(Second Wave)’로 표현한다.

이들이 빼어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탁월한 실력의 프리랜서 연주자들이 있었다. 특히 바이올린 파트의 가용 자원이 풍부했다. 훗날 독주자로 이름을 날린 캐서린 맥킨토시, 존 홀로웨이, 로이 굿맨, 엘리자베스 윌콕, 모니카 허짓 등 ‘젊은 피’들이 여러 고악기 오케스트라를 오가며 멋진 화음을 만들었다. 이들보다 좀 나중에 등장한 앤드류 맨츠 역시 초기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맨츠의 공식적인 첫 녹음은 1988년에 나온 호그우드 지휘의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L'oiseau Lyre)이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전공할 무렵 만난 지휘자와의 인연 때문에 맨츠는 종종 고음악 아카데미(The Academy of Ancient Music)에 참여하곤 했다. ‘제2바이올린 파트의 맨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바이올린을 켰다’는 회상처럼 녹음 속에서 맨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가의 경지에 오르기 전, 합주의 하모니를 빚으며 자양분을 흡수했다는 점에서 오케스트라 속의 초기 모습은 의미가 있다. 이밖에 패로트가 지휘하는 태버너 플레이어스(헨델의 ‘메시아’ EMI), 스탠디지의 콜레기움 무지쿰 90(텔레만 협주곡집 Chandos), 코프만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바흐의 두 개의 수난곡 Erato)에서도 반갑게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에서는 89년부터 4년간 정식 단원으로 활동하며 나중에는 악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이 시절 코프만의 지휘로 만든 음반들이 아직도 명연으로 회자된다. 그의 능력을 간접 증명하는 셈이다.

맨츠는 93년 독주에 전념하고자 암스테르담을 떠났다. 87년 류트 주자인 나이젤 노스, 하프시코드 주지인 존 톨과 함께 조직한 ‘라 로마네스카’는 그 이상을 실현시키는 중요한 도구였다. 녹음 계약한 프랑스 아르모니아 문디는 예술의 터전이 돼주었다. 94년 맨츠의 이름을 내건 첫 독집 비발디의 ‘맨체스터 소나타집’이 나왔다. 따뜻한 질감과 감각적인 장식음이 기존의 이탈리아 연주와는 사뭇 다르다. 알레그로 악장의 번득이는 질주뿐 아니라 느린 악장의 서정적인 패시지 모두 감칠맛을 냈다.

맨츠는 단번에 비발디의 명 해석가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특정 작곡가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었다. ‘그라운드 베이스에 의한 3성 소나타집’, 판돌피 앨범 등 이어진 녹음들을 통해 연주자는 17세기의 바이올린 예술을 전반적으로 재정립하려는 꿈을 드러냈다. 95년에 나온 비버의 소나타집은 하이라이트이다.

그는 1681년 출판된 8개의 소나타의 텍스처를 오밀조밀 현란하게 엮었다. 악보에 나타나지 않은 빠르기 변화를 적용하여 악상을 판타지 풍으로 전개시켜 악곡에 생명력을 더한다. 톨의 하프시코드가 정갈한 화음으로 맨츠를 도왔으며, 노스가 명석하고 섬세한 터치로 류트 독주를 위한 파사칼리아 트랙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맨cm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동시에 비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음반. 이어 발매된 텔레만의 ‘12개 환상곡’, 슈멜처의 소나타집, 마리니의 인벤션 앨범 역시 바로크 시대 독일과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양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맨츠의 디스코그래피에는 협주곡 앨범이 부쩍 늘었다. 코프만의 지휘 아래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Erato)는 원전 해석의 정석으로 통한다. 매끄럽고 상쾌한 프레이징에 독특한 아포지아투라(특정 음을 지지하기 위해 앞서 연주하는 일종의 장식음) 기법을 더한 그의 운궁은 흔히 듣던 멜로디에 참신함을 불어넣는다. 그가 악장을 지냈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반주도 한없이 쾌적하다.

바흐의 협주곡집(HMF)은 한층 발전된 기교와 악곡 장악 능력을 보여준다. 이 음반은 맨츠가 지휘에 눈을 뜬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90년대 초 맨츠는 쾰른의 ‘라 스트라바간차’와 ‘카펠라 코펜하겐’을 번갈아 통솔하며 몇 종의 음반을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외도에 그쳤다. 97년 그는 호그우드로부터 고음악 아카데미의 공동 지휘자 자리를 제안 받고 곧 수락했다. 이로써 한 사람의 스타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독재’하는 시스템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맨츠는 원전 그룹의 ‘민주 시대’에 첫 발을 내딛는 영예를 안았다. “난 리허설 때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단원들이 ‘오늘밤 콘서트는 어제의 재탕이 아니겠군’이란 생각을 갖게 하죠. 아이디어는 저뿐 아니라 누구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난 민주적인 방식의 중재자일 뿐이죠.” 바흐의 협주곡 뿐 아니라 제미니아니와 헨델의 합주 협주곡(HMF) 등 그가 지휘와 연주를 동시에 맡아 녹음한 음반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혁명가적 기질이나 듣는 이를 압도하는 카리스마 대신, 청량한 화폭에 넉넉한 템포, 고정되지 않은 양식이 그것이다. 밝은 색채의 건강한 사운드 역시 이탈리아나 독일 등 대륙의 기질과 선을 긋는 특징이다.

2002년은 맨츠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30년간 잉글리시 콘소트를 이끌던 트레버 피노크가 사임하면서 후임 지휘자로 맨츠를 지목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맨츠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완숙한 경지에 오른 독주와 지휘 능력을 ‘예술 감독’이라는 새로운 직함으로 선보이는 제2의 인생을 열었다. 그것은 레퍼토리의 비약적인 확장과 독주자의 지휘자 변신, 386세대의 전면 등장, 마이너 레이블의 주도로 대표되는 원전 음악 ‘제3의 물결(Third Wave)’을 선도하는 첨병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맨츠의 레코딩은 독주와 지휘, 2중 패턴을 굳혔다. 독주 활동에는 큰 변화가 왔다. 로마네스카가 99년 해체되고 음악원 동기인 하프시코드 주자 리처드 에가를 새 파트너로 맞이했다. 바흐와 헨델, 코렐리의 바이올린 소나타 시리즈가 파트너십의 열매로 태어났다. 세 작곡가는 3색의 개성을 보여준다. 바흐는 감성이 풍부한 반면, 헨델은 차가운 직관이 돋보인다. 코렐리는 짐짓 비르투오시티를 과시하는 품이다. 하지만 세 음반 모두 바로크의 진경을 보여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94년에 나온 비버의 ‘묵주 소나타’는 악곡에 깃든 신비의 종교성을 종교성을 세속의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제의이다. 풍부한 상상력과 흠결 없는 스코르다투라(변칙조율) 주법으로 10년 전 일구었던 비버의 영광을 다시 재연한 절대 명연. 고전파에 대한 첫 도전으로 내놓은 모차르트 소나타 1집도 다른 연주에서 맛보기 힘든 재미를 안겨준다.

1781년작 4편을 통해 맨츠는 호방한 보잉과 색채적인 프레이징, 때로는 과장된 해석을 앞세워 바로크에서 한층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준다. 하프시코드에서 포르테피아노로 악기를 바꾼 에가의 반주 또한 명석하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완벽한 사이클의 탄생을 기대케 한다. 모차르트와 비버는 잉글리시 콘소트의 지휘자로서 처음 선택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관현악집과 비버의 미사 앨범은 독주 실력을 포디엄에 그대로 옮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에서 맨츠는 잉글리시 콘소트로부터 서늘한 음향과 매서운 합주력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합창이 가세한 후자는 흠잡을 데 없는 밸런스와 기악과 성악의 고른 선곡이 잘츠부르크의 성당의 위용을 드러낸다.

● 원전 연주, 이것부터 알고 듣자

/박정준

-과거에서 배워 미래를 지향한다

“정격음악이 도대체 뭐지?”
“가발 쓰고, 옛날 악기로 연주하는 거래. 그것도 다 유행이래.”

몇 년 전 연주회장에서 살짝 엿듣게된 대화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해의 소지가 많다. 이처럼 아직도 원전 연주에 대한 오해는 깊고, 이해는 멀다. 이 칼럼을 통해서는 원전 연주의 기초적인 이해를 위해 몇 가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원전? 정격? 고음악?

이런 스타일의 연주를 통칭해 가리키는 ‘원전 음악’ 또는 ‘정격 음악’은 영어 ‘Authentic Music’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원전 연주’라고 하겠다. 가장 심한 오류는 ‘고음악’과 동의어로 취급되는 경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인터넷에는 그렇게 소개되고 있다. 고음악은 말 그대로 서양 음악중 옛 음악들이다. 일반적으로 바로크 이전의 음악들을 이야기한다. 원전 연주란 고음악을 작품이 작곡된 당시의 악기(또는 복원악기)와 연주 양식을 연구해 그대로 재현해 연주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설명보다는 의미가 크고도 다양하고도 넓고도 깊은 것이 원전 연주의 세계다.

-템포가 너무 빠르다?

원전 연주가들은 보통 악보에 지정된 빠르기를 메트로놈 속도에 가깝게 연주하는데, 연주효과 외의 여러 다양한 요소들을 감안해 약간의 속도 가감을 한다. 그런데 낭만주의 시대와 20세기 전반기까지 악보에 지정된 템포보다 느리게 연주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기 때문에 원래대로 연주하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고 느껴지게 된 것. 실지로 베토벤 ‘합창교향곡’의 여러 레코딩에서 최근 것일수록 연주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원전 연주가들의 연구 결과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반영된 결과다.

-A음 피치가 변할 수도 있다?

A음은 440Hz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피치를 약간 올리면 소리에 카랑카랑한 화려함이 생긴다. 이를 조금씩 올리다 보니 20세기 일부 오케스트라는 448Hz까지 올려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는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연주계 일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반에는 A를 435Hz로, 그 이전에는 415Hz에 맞췄다는 기록도 있다. 원전 연주가들은 어떤 악곡의 연주에 있어서 시대, 지역, 양식, 악기, 작곡가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피치를 정한다. 그래서 435Hz인 경우도 있고, 443Hz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전연주가들의 연구 성과는 여러 오케스트라 연주 관행상 지나치게 높아진 피치를 440Hz으로 되돌려 놓았다.

-원전 연주는 레코딩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현실적으로 원전 악기의 음량은 현대악기보다 적은 편이며, 작곡가가 지정한 편성을 그대로 따르다보면 음량은 더욱 줄어든다. 낭만주의 이후 악기의 음량은 더욱 커졌고, 편성을 늘려 윤색해 연주하다 보니 원래의 음향을 잃게 되었다. 원전 연주가들은 악기와 편성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음량과 음향에 대해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연주 공간, 연주 청취 거리, 다이내믹, 신선한 음향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런 점들이 레코딩에 반영된 것이다.

설명으론 괜히 어려운 듯 보이는데, 실제로 원전연주를 들어보면 20세기 후반에 새롭게 클래식 애호가로 유입된 층이 왜 원전연주에 열광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약동하는 신선한 템포 설정과 원전악기들로 구성된 '바소 콘티누오(베이스 지속반복음형)'의 신선한 사운드가 오히려 현대인의 감성에 맞기도 하고, 음악을 너무 점잖게만 연주하지 않고 파격(물론 학구적인 악보 연구를 통한)을 시도하기도 한다.

-비올라면 비올라지, 비올은 뭔가?

정답은 바이올린 족과 비올 족이다. 즉, 첼로는 바이올린 족이고 비올라 다 감바는 비올 족이다. 비올 족 악기들의 매력을 다시 살려낸 것이 원전 연주가들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연주가는 조르디 사발.

바이올린 족 악기들도 원전연주 시는 거트(양장; 羊腸)현을 써서 연주한다. ‘구절양장’이나 ‘곱창’이 떠오른다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도 가축에서 버리는 부분이 없었듯이 서양인들도 대표적인 가축인 양에서 버리는 부분이 별로 없었다. 양피지 또한 대표적이다. 거트현을 쓰면 주법이 여러모로 달라야한다. 이 또한 원전연주가들이 노력해온 부분이다.

원전 연주 현악분야에서 비브라토를 쓰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비브라토를 대체하기 위해 화려한 장식음을 쓴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비브라토와 장식음은 별개이며 어떤 악곡의 연주에 있어서 시대, 지역, 양식, 악기, 작곡가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해 연주가마다 다른 연주를 내놓는다. 그것이 또한 여러 원전 연주들의 연주를 비교해 듣는 재미를 준다.

-원전주의자 가디너의 예

캠브리지의 10대 대학생 존 엘리어트 가디너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학생들을 모아 철저한 아마추어리즘과 학구열로 무장한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시작한 게 1964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류한 오케스트라는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트 또는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꿔가며 연주했다. 그리고 가디너의 이름만 들어가 있어도 원전 연주 팬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던 음반을 뿌리던 것이 1980년대와 90년대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이제는 어느 정도 매너리즘에 빠진 그를 맹추격하는 원전 연주계 후배들의 도전도 만만찮다.

현존하는 원전연주계의 중요한 인물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열거해 보면 아르농쿠르, 빌스마, 야콥스, 가디너, 피노크, 브뤼헨, 쿠이켄, 헤레베헤, 사발, 쿠프만, 앙타이, 민코프스키, 카르미뇰라, 비욘디, 맨츠, 알레산드리니 등등이다. 빠진 사람도 많다. 이들이 이름이 찍힌 어떤 음반을 사도 원전연주에 성공적으로 입문한다는데 한 표다. 위의 인물들은 거의 지휘자로서 활동하며 연주단체를 이끌고 있는 인물들이니, 그 파괴력이 세계음악계에 일파만파로 번져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악보 연구와 음향 탐구 등의 성과로 지난 20세기 후반에 원전주의자들은 과거의 음악을 미래지향적으로 해석하는 선봉에 서왔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리그에 머물지 않고 전반적인 음악계의 연주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원전 연주는 오늘 이 시간에도 새로운 성과들을 내놓고 있으므로 어느 것도 확정적인 것은 없다. 열린 미래를 향하는 힘, 이것이 원전 연주의 가장 큰 동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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