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채널 ‘레드 카펫 위의 스타들’ 방영

서울--(뉴스와이어)--현지시각으로 5일 저녁8시에 진행되는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세계 영화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오스카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카데미상의 수상은 영화인에게는 일생의 가장 큰 명예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은 시상식의 꽃이라고 할 만큼 큰 관심의 대상이다. 국내 유일의 역사전문방송 히스토리채널은 1일부터 남녀주연상에 빛나는 역대 할리우드 스타 콜렉션 시리즈인 <레드 카펫 위의 스타들>을 선보인다.

1일 방영되는 클라크 케이블을 시작으로 비비안리, 험프리 보가트, 그레이스 캘리, 잉그리드 버그만, 라이자메넬리, 시드니 포이티어, 다이안 키튼, 캐서린 햅번, 로버트 듀발, 톰행크스 등이 나온다. 비천한 태생에서 할리우드 제왕이 되기까지 수많은 여인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클라크 케이블’, 본인이 연기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과 실제로 너무나 닮은 캐릭터를 가진 ‘비비안리’, 고독한 터프가이자 동시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로맨티스트 ‘험프리 보가트’, 배우로서 정상의 자리에 있다 모타코의 아름다운 왕비가 된 ‘그레이스 캘리’ 등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다 간 혹은 살아가고 있는 배우들의 인생 여정을 본다.

본 프로그램은 1일부터 17일까지 평일 오전11시와 밤10시에 방송된다.(10일 제외)

다음은 편별 상세 내용입니다.

1일 (수)

클라크 케이블 (7회 남우주연상)

"비천한 태생에서 할리우드의 제왕이 되기까지, 그에겐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유들유들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던 레트 버틀러와 동일시되는 인물 클라크 게이블. 그는 1901년, 유전(油田)개발이 열병처럼 번지던 미국 남부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첫돌이 되기 전에 생모를 잃고 새엄마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새엄마의 손에 이끌려 연극과 노래 등을 배우게 된 클라크 게이블은 교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데, 이때부터 주로 연상의 여인에게 끌리는 그의 습성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새엄마가 죽은 뒤 갖가지 잡역을 전전하던 그는, 여러 명의 정신적(혹은 실질적) '조강지처'들의 헌신에 힘입어 지방극단과 브로드웨이를 거쳐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된다. MGM에 의해 픽업된 그는, 처음엔 부족한 연기실력과 지나치게 큰 귀(耳) 때문에 주연을 맡지 못하다가, 점차 남다른 카리스마와 노력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확고한 스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상대역을 맡은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기로 유명했던 그는, 조앤 크로포드, 로레타 영, 캐롤 롬바드, 버지니아 그레이, 케이 윌리엄스, 라나 터너 등의 아름다운 스타들과 줄줄이 사랑에 빠진다. 세 번째 아내였던 캐롤 롬바드를 비행기 사고로 잃은 그는, 마흔 두 살의 나이에 공군으로 2차대전에 자원해 입대한다. 스크린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진정한 영웅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귀환한 후에도 여러 편의 히트작을 선보이다가 1960년, 마지막 작품인 영화 "기인들(The Misfits)"의 촬영을 마친 지 9일 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은 지 4개월 후,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었던 케이 스프레클스는 클라크 게이블의 아들을 출산한다.

2일(목)

비비안리 (12, 24회 여우주연상)

“그녀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녀는 신비로운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재능과 놀랄만한 열정, 이것이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스칼렛 오하라에서부터 블랑쉬 드보아, 줄리엣, 클레오 파트라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여배우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추도사의 내용처럼 전 세계인들은 지금까지 비비안 리를 기억한다.

1967년 그녀의 동료이자 세 번째 연인인 잭 메리벨이 그녀의 아파트에서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비비안 리는 손에 로렌스 올리비에의 사진을 쥐고 있었다고 한다. 비비안 리의 삶은 세 번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영화였다. 그녀의 실제 모습은 오스카상을 안겨준 두 편의 영화 속 여주인공과 너무나 닮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젊었을 때 비비안은 스칼렛의 모습 그대로였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자신의 고집대로 모든 것을 해온 그녀는 스칼렛만큼 열정적이고 욕심이 많았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여성이었다. 특히 애쉴리에 대한 스칼렛의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그녀는 로렌스 올리비에를 사랑했다. 신경질적이며 진실한 사랑을 찾아 헤매던 블랑쉬 역시 비비안의 모습과 흡사했다. 당시 비비안은 폐결핵에 걸려 있었고, 아이를 원하는 로렌스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3일(금)

험프리 보가트 (24회 남우주연상)

험프리 보가트는 악역 전문 배우로 출발했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재능을 바탕으로 이후 워너브라더스 사에서 성격파 배우로 자리잡게 되었다. 필름 누아르의 선구자격인 '말타의 매'에서는 할리우드 사립탐정의 전형을 만들어냈고, 메이저 영화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필름 누아르인 '빅 슬립'에서는 범죄 음모 속에서 활약하는 샘 스페이드 역으로 모던한 탐정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카사블랑카'에서는 냉소적인 로맨티스트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냈다.

스크린 밖에서는 '소유와 무소유'와 '빅 슬립'에서 함께 연기한 모델 출신 배우 로렌 바콜과의 전설적인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24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45년 '빅 슬립'의 대히트로 보가트는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는 배우가 되었다. 51년 '아프리카의 여왕'에서는 주정뱅이 선장을 호연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험프리 보가트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더불어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반쯤은 선하고 반쯤은 악한 그만의 독특한 영화 속 이미지는 이후 많은 감독과 배우들에 의해 패러디되고 있다.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고독한 터프가이로서, 때로는 낭만적인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냉소적인 로맨티스트로서, 그는 오래도록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6일(월)

모나코가 사랑한 배우, 그레이스 켈리 (27회 여우주연상)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에 있는 '아메리칸 드라마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녀는, 49년 스트린드버그의 'THE FATHER'에서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60여 편의 TV 드라마에 출연한 그녀는 51년 할리우드의 출연 제의를 받게 되었다. '하이눈'에 캐스팅된 그녀는 작은 역할이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이 영화의 감독 존 포드는 그녀를 다시 '모감보'에 캐스팅했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상에도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안았다.

또 전설적인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눈에 띄어 '다이얼 M을 돌려라'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작품의 히트로 두 사람은 이후 여러 편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53년 '이창'으로 다시 한번 히치콕 감독과 만난 그레이스 켈리는 마침내 할리우드 스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모만큼이나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고, 영화 '컨트리 걸'로 이전과는 180도 다른 역할에 도전했다. 변신은 성공적이었고, 평론가들에게도 크게 호평 받았다.

다음해인 54년 여름,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의 촬영차 프랑스 남부에 갔던 그녀는, 사진작가의 요청으로 모나코의 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지적인 아름다움에 반한 모나코의 왕자 '레이니에'는 1년간 끈질기게 구애를 했고 결국 그녀는 뮤지컬 '상류사회'를 끝으로 스크린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56년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에 공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왕비로서의 삶은 예상보다 훨씬 힘든 것이었고, 그녀는 장녀 캐롤라인과 장남 앨버트를 출산한 후에도 계속 영화계를 그리워했다. 이런 그녀에게 히치콕 감독이 영화 '마니'의 주인공 역을 제안했지만, 모나코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스크린 복귀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크게 실망한 그녀도 65년에 막내 '스테파니' 공주를 출산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60년대 말부터 결혼생활에 위기가 왔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갈등을 겪으면서도 두 사람은 슬기롭게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82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가족과 시골로 여름 휴가를 떠났던 그녀가 손수 운전을 해 막내딸과 궁으로 돌아가던 중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딸은 무사했지만 그레이스 켈리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뇌손상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지적이고 우아한 할리우드의 여배우에서 모나코의 아름다운 왕비로, 레이니에 공의 아내로, 알버트, 캐롤라인, 스테파니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평생 영화같은 삶을 살았던 그녀는 53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모나코 왕비이자 아름다운 여배우였던 그레이스 켈리는 언제까지나 전 세계인의 마음 속에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여성'으로 기억될 것이다.

7일(화)

가스등, 잉그리드 버그만 (29회 여우주연상)

잉그리드 버그만은 191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친척집에서 외롭게 자란 그녀는 조금씩 배우의 꿈을 키워나갔다. 17살에 스웨덴 영화학교에 입학한 후 1934년 마침내 영화에 데뷔하게 됐고, 37년엔 스웨덴 최고의 여배우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38년 마침내 할리우드에 진출한 버그만은 데이비드 셀즈닉의 ‘인터메조’를 시작으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41년), ‘카사블랑카’(42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43년) 등 수많은 화제작에 출연하며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44년에는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브로드웨이 연극 ‘개선문’으로 토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49년 가정이 있는 몸으로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염문설이 터지자 대중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영화 속 비련의 여인의 이미지를 현실과 동일시했던 대중들은 이듬해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아들을 출산하자 배신감에 더욱 거센 비난을 퍼붓게 된다. 51년 로셀리니와 재혼한 후 할리우드에서 추방당하다시피한 그녀는 이탈리아에 정착하고 된다.

52년에는 할리우드에 재입성해 ‘아나스타샤’로 두 번째 오스카를 거머쥔다. 58년에 사업가 라스 슈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한 후에도 꾸준히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던 버그만은 74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유방암 판정을 받은 그녀는 82년 이탈리아 여자 수상 골다 메이어의 일대기를 그린 TV영화 ‘골다 메이어’에서의 열연으로 에미상을 수상하지만, 그 해 자신이 태어난 날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8, 9일(수, 목)

카바레, 라이자 미넬리 (45회 여우주연상)

라이자 미넬리는 1946년 영화감독 빈센트 미넬리와 배우 쥬디 갈랜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명성 덕에 탄생과 동시에 만인의 주목을 받은 그녀지만, 영화 '카바레'에서의 열연으로 스타덤에 오른 후 토니상, 그래미상, 아카데미상까지 휩쓴 그녀의 재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년간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라이자 미넬리는 이제 쇼 비즈니스 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녀에게도 고통은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와 '스타탄생'으로 유명한 어머니 쥬디 갈랜드의 후광에 가려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고, 결혼도 4차례나 실패했으며, 술과 약물에 찌들어 지냈던 때도 있었다. 4번째 남편 데이비드 게스트와의 결별 후 처음으로 갖는 이번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일과 그동안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밖에도 마틴 스콜세지, 비욘세 놀스, 로버트 드 니로, 골디 혼, 미아 패로우 등 많은 동료와 친구들이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 관한 숨겨진 비화 등을 들려준다.

13일(월)

언제나 마음은 태양, 시드니 포이티어 (36회 남우주연상)

스파이크 리, 로렌스 피쉬번, 우피 골드버그, 덴젤 워싱턴...

현재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초특급 배우인 이들에게 배우의 길을 걷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하나같이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할 것이다. 시드니 포이티어!

미국 흑인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시대에 시드니 포이티어는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 당시 영화 속 흑인의 역할은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단역들이었다. 후에 포이티어는, 우연히 빠르게 변하는 영화 시장에서 좋은 배역을 따내는 행운을 잡았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때로는 강한 힘이, 때로는 부드러운 요령이 필요한 힘든 관문이었는데, 그 역사적인 일은 시드니 포이티어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슨 역할을 맡든지 그는 탁월하게 연기해냈고 관객들은 그가 그려내는 인물 때문에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연기라고 하기보다는 마치 실제 인물인양 느껴지게 하는 힘이 포이티어에게는 있었다. 그 특별한 자질은, 끊임없이 그가 속한 세계와 자신의 위치를 되묻고 노력을 해온 사람에게만 힘들게 부여되는 능력이다.

흑인 제대군인이 우연히 만난 수녀들을 도와 예배당을 짓는 과정을 잔잔한 감동으로 묘사한 흑백영화 ‘들의 백합’으로 그는 196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4일(화)

다이안 키튼 (50회 여우주연상)

1977년 우디 앨런의 <애니홀>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이안 키튼은 배우, 감독, 프로듀서로서 현재까지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녀는 <대부>에서 알 파치노의 상대역을 맡아 열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우디 앨런의 <애니홀>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46년생인 그녀의 본명은 다이안 홀. 19세에 뉴욕에 와서 연기 수업을 받았고, 록 뮤지컬 <Hair>의 오리지널 캐스팅 멤버이기도 하다. 30년 동안 배우로서 꾸준한 연기를 선보인 다이안 키튼은 1987년 <헤븐>으로 감독 데뷔한 후, 코미디 영화 <지금은 통화중>에서 주연과 감독을 동시에 맡았고, 지난 해 칸느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엘리펀트>의 제작을 맡기도 했다. 올해 개봉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그녀는 중년 여성의 아름다움을 매혹적으로 과시하며, 과감하게 전신 누드를 마다하지 않고 열연을 펼쳤다.

15일(수)

캐서린 햅번 (6, 40, 41, 54회 여우주연상)

예쁘고 수동적이기만 했던 할리우드 여배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강하고 독립적인 성격으로 사랑을 받았던 위대한 여배우 캐서린 헵번의 일생을 돌아본다.

60년이 넘는 배우 생활 동안 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 사상 유례없는 4번의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한 캐서린 헵번은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의 세기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당시 제작스튜디오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만 했던 여느 배우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언제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어떤 좌절이 와도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이러한 독립적이고 이지적인 성격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되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할리우드의 전설이 되었다.

언제나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은, 대부분의 여배우가 나이가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 데 비해 80이 넘는 나이에도 화면에 얼굴을 드러내는 용기에서 잘 읽을 수 있다.

그녀는 배우에 대한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후에 나온 많은 배우들에게도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일에 있어선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캐서린이었지만 평생을 두고 사랑한 스펜서 트레이시에겐 더 없이 순종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 되고 있는 이들의 안타깝고도 열렬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된다.

16일(목)

지옥의 묵시록, 로버트 듀발 (56회 남우주연상)

40년 동안, 배우 ‘로버트 듀발’은 ‘앵무새 죽이기’의 ‘부 래들리’에서 ‘대부’의 톰 헤이건, ‘지옥의 묵시록’의 킬고어 중령, ‘사도’에서 소니 듀이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많은 인물들에게 인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기를 해왔다. 이토록 일관되게 최고의 연기를 해온 배우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듀발의 연기력은 뉴욕에서 연기 생활을 시작한 신인 시절부터 갈고 닦은 노력의 결과이다. 그에게 연기란 곧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듀발은 텍사스 변두리이건 뉴욕 중심지이건 자신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문화 속에 몰입시킨다. 이 배우에게 장소의 의미는 너무나 큰데, 아마도 군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어린 시절에서 기인한 듯하다. 우연히 연기를 시작하게 됐고 그 후 자신이 이 일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연극 무대에서 실력을 연마했고, 31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한다.

그 후로 할리우드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배우와 감독들과 함께 일하게 되고, 또한 스스로 제작과 감독을 겸하는 등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세기의 배우라는 명성을 날렸지만, 그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하게 했고, 할리우드식의 화려한 생활을 멀리했다.

영화를 찍고 있지 않을 때는, 버지니아 북부에 있는 360에이커나 되는 자신의 농장에서 키우는 개와 산책을 하거나, 춤 연습장으로 개조한 헛간에서 ‘루시아나‘라는 아르헨티나인 여자친구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를 볼 수 있다.

세 번의 결혼 실패를 포함해서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며 많은 변화를 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한다. 그의 보수성은 군인 집안에서 성장한 결과이며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에 감독이나 스텝들과 종종 의견 충돌도 있다.

이제 영화계에 투신한 지 40년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미국배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카우보이에서 상류층 신사까지 다양한 연기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드문 배우이다.

17일(금)

흥행의 백지수표, 톰 행크스 (66, 67회 남우주연상)

현대 미국인의 영웅, 톰 행크스. 헐리우드에서 톰 행크스가 수상하지 못한 상은 없을 정도로 그는 미국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나 로버트 드니로 등,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그가 이처럼 전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뭘까? 어려서 부모의 이혼을 겪은 뒤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해가며 연기를 공부하고, 연극, 영화, 방송을 거치며 착실히 연기경험을 쌓은 그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도 데뷔시절의 마음가짐과 겸손함을 잃지않고 있다. 또 연기면에서는 어떤 역을 맡겨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성격배우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비록 한번의 이혼을 겪긴 했지만, 재혼한 아내와 아이들의 자상한 아빠로, 탄탄한 가정을 지키고 있다. '스플래쉬'부터 '포레스트 검프' '필라델피아' 최근작인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등, 톰 행크스의 연기인생을 돌아보고 그에 대한 주변이 평가를 들으며 '자연인, 톰 행크스'를 만나는 시간.



중앙방송 개요
중앙일보 방송법인 중앙방송은 논픽션 채널 Q채널과 역사전문 다큐멘터리 채널 히스토리채널을 케이블과 위성에 동시방송하고 있으며, 2005년 1월 개국한 골프채널 J 골프는 케이블로 찾아뵙고 있습니다.앞으로도 더 나은 볼거리와 즐거움을 드릴 수 있는 채널로 거듭 날 것임을 약속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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