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TV 3.1절 특집 방송 ‘난징대학살, 그날의 증언과 기록’

서울--(뉴스와이어)--피해자 30만명, 6주간의 학살 강간 약탈 방화가 저질러진 1937년 난징.역사상 유례 없는 잔인한 만행이 벌어진 난징대학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날의 참혹한 참상을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증언하고 세계에 알렸을까.

중국전문방송 중화TV는 3.1절 특집으로 '난징대학살'을 3월1일 오전 9시, 저녁 6시 방영한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1938년 1월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일반시민 학살사건이다. 일본군은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천명을 살해하였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악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도 횡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에도, 또한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존매기목사의 카메라 렌즈는 창문 뒤에서 그날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일본군들이 중국인들을 한곳에 몰아 놓고 부녀자들은 남편 혹은 아들을 살려 달라며 빌고 있다. 손에 굳은 살이 박히면 총을 잡은 흔적이라며 철사로 묶어 집단으로 불태워 죽였다.

난징 국제안전지대에서도 만행은 저질러졌고 12월 17일 하루에 일어난 강간사건만도 1천건이 넘었다.

금릉대학 병원에 남았던 유일한 외과의사였던 로버트 윌슨은 '리슈잉'에 대해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임신 6개월의 19세 임산부 리슈잉은 일본군에 반항해 배를 찔려 유산하고 얼굴에 18차례 칼을 맞고 37곳을 봉합했다. 이 모든 일을 일본 총사령관에게 항의했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일관했고 아사히신문 기자조차도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라며 방임했다고 적고 있다.

시카고 데일리 기자 스티엘은 난징학살 3일째인 12월 15일 처음으로 만행 사실을 미국으로 전했다. 12월17일 미국 기자 도튼도 뉴욕타임스특별 기고를 통해 학살을 전했다. 일본 정부는 진상 폭로를 두려워해 언론통제를 했고 사실을 감추기 위한 각종 포스터와 사진을 만들어냈다.

존 매기 목사는 1938년 1월 목숨을 걸고 필름을 상하이로 가져갔고 필름 복사본은 전세계에 난징학살을 알리는 전사가 됐다.

야즈마 시로는 일본군 16사단 20연대의 상병으로 난징학살에 참가한다. 1987년 일본 교토의 평화전람회에서 시로는 자신의 전쟁일기를 공개하고 전우회에서 제명된다. '난징전쟁'을 저술한 마츠오카 타마키의 녹취록에서 일본 노병 250면 중 단 3명만이 범죄행위를 인정했다.

일본 우익세력은 2000년 1월 23일 오사카에서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집회를 열고 이는 중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의 분노를 샀다. 이튿날인 24일 난징 시민들은 흩날리는 눈발 아래 항의집회를 열고 난징의 진실을 지키자고 다짐한다.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것은 학살을 겪은 이들을 두번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난징시민들은 일본 우익을 위증자로 단죄하며 도쿄법원에 명예훼손 보상금 등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다. 마침내 승소하지만 소송 당사자인 리시우잉은 승소문이 도착했을 땐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1985년 난징대학살 피해자 기념관이 건립된다. 중국 최초의 항전내용을 담은 테마기념관으로 난징 시내 곳곳의 학살지역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1994년부터 매년 12월 13일 난징에는 방공경보가 울린다.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의미이다. 2002년 12월 13일 난징에서는 대규모 평화집회가 열리고 중국의 평화선언이 발표된다.

난징의 진실은 말한다. '역사를 기억하고 과거를 잊지말며 평화를 사랑하고 미래를 열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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