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숙의원의 유럽 간판문화 시찰기
3월6일 오후 1시05분 비행기로 서울을 출발하여 저녁 6시경에 로마에 도착하여 바로 호텔에 투숙했다. 실제로 로마에서는 7일 하루를 일하고 8일 오후 1시 비행기 타기 전 오전에 2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 7일 아침 로마 시청으로 가서 Mrs. Maria Pia Gavaglia 부시장을 면담했다. 전직 의원이기도 한 부시장은 여성의원이 대표단에 있어 반갑다는 인사를 곁들였다. 인사 차원의 덕담들을 나누고, 곧 바로 로마시 제8국의 간판, 광고 담당 국장을 면담했다.
주로 간판규제와 관련된 법률 및 규칙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자료도 받았다. 로마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역사적 유적지가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historic site로 지정된 지역에 대한 간판규제는 아주 엄격하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이 지역에는 빨간색으로 된 간판은 걸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정 회사의 로고 자체가 빨간색인 경우에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오전에는 실무자들 면담을 통해 간판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오후에는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실제로 간판을 보고 사진을 찍는 작업을 했다. 귀국해서 우리가 본 유럽의 간판 실태를 다른 위원들과 공유하고 또 사진전을 통하여 보여줄 계획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간 로마에 몇차례 다녀 갔지만 간판을 눈여겨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목적이 간판이다 보니 보이는 것이 간판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있다”는 명제가 더 옳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간판은 “더 크게, 더 많이, 그리고 더 휘황찬란하게” 바뀌고 있다. 서울은 마치 온 도시를 간판이 뒤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디를 둘러봐도 그렇게 눈에 거슬리는 간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간판이 작고, 적은 만큼 건축물이 아름다웠고 도시 경관이 뛰어나 보이기도 했다. 간판을 찍으러 다니면서 중간중간 아름다운 로마의 경관을 함께 즐기는 덤을 누렸다. 아마 하루 종일 2만보를 넘게 걸었던 것 같다.
로마에 머문 3월8일이 마침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로마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남성들이나 가족, 친구들이 여성들에게 꽃을 사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특히 ‘미모사’라고 불리는 노란색 꽃을 준다고 한다. 덕택에 나도 함께 간 이계진, 김재윤 의원으로부터 미모사 꽃을 선물로 받아 여행중 즐거운 추억꺼리를 하나 더 얹었다. 꽃을 받아들고 시내를 나오면서 보니 시내 곳곳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 우리도 이런 관습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일 오전 한 시간가량 바티칸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없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 방만 집중적으로 보고 나왔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은 정말 압권이었다. 바티칸이 가진 세계적인 명작 - 그림, 조각 및 기타 고서 등등 - 만해도 그 값을 매길 수가 없을 것 같다. 다 팔면 미국을 살수 있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하며 웃었다. 곧 바로 비행장으로 가서 다음 행선지인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두 번째 행선지 - 암스테르담 (3월8일-9일)
8일 오후 1시30분에 로마를 출발하여 오후4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공항에 도착했다. 바로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로테르담으로 가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저녁 7시에 로테르담의 유명한 디자인연구소인 Studio Dumbar를 방문했다. 네델란드는 정부가 발주하는 공공디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다고 한다. 둠바스튜디오의 경우 정부측 디자인이 총 매출의 64%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준비된 비디오 상영을 하면서 네델란드의 디자인 산업에 대한 설명과 현황을 보고받고 간판문화에 대한 토론을 가졌다. 밤9시가 넘어 저녁을 먹었다.
3월9일 아침 8시. 겨우 하룻밤을 자고 다시 짐을 챙겨들고 로테르담 시내 - 중앙역, 라인반 거리 등 - 를 돌면서 간판 및 건축물들을 돌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시청의 도시경관 담당자를 면담했다. 이곳도 1994년 전에는 간판이 아주 복잡했다고 한다. 94년에 법을 개정하여 역사적으로 보호해야 할 지역을 지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간판규제는 아주 엄격하게 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24,000개의 집 가운데 8,000개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 보호구역에는 개축을 할때도 반드시 주변 건축물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정부에서 세제혜택을 주고 있다고 한다. 간판에 로고 정도는 가능하지만 그림은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을 달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었다. 간판은 한 가게에 두개씩만 허용하고 있었고, 크기도 규제하고 있었다. 또한 1년에 한번씩 간판에 대한 세금을 내고 있었다. 옥외간판에 대해서는 광고세를 받고 있었다. 시청담당자의 비디오 및 발표준비가 완벽하여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 행선지 - 베를린 (3월9일 - 11일)
암스테르담 시청에서의 면담이 길어져서 시청에서 바로 공항으로 나갔다. 간단한 저녁을 공항에서 먹고 오후 7시 베를린을 향해 출발하여 저녁 8시30분 베를린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서 권영민 주독대사님과 ‘한국의 해’ 행사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일 오전 9시 호텔을 출발하여 베를린 시내 - 쿠담거리, 운터 덴 린덴 거리 등 - 간판을 보고 다녔다. 통독 이후 베를린 시가지는 눈에 띄게 깨끗하고 아름다워졌다. 건물이 크고 웅장할수록 간판은 더 작아 보였다. 눈에 띄는 간판이 별로 없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점심때 까지 간판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은 후 오후 2시에 베를린 시의 한 구에 속하는 미테구청의 건설국장을 면담했다. 건설국장은 여성이었고 이 일을 20년 넘게 해오고 있는 전문가였다.
베를린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적 유산에 속하는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앙통에 속하는 ‘운터 덴 린덴’ 거리에는 일체의 입간판 설치를 금하고 있었다. 주거지역에는 생산품 광고를 금하고 있기도 했다. 특히 주거지역의 경우 빛이 너무 강한 조명을 쓰는 광고를 금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거리의 특성에 따라 간판의 종류 및 크기, 개수를 정하는 융통성을 보이고 있었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베를린시가 공공화장실을 건립하여 운영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회사로 하여금 공중화장실을 지어서 운영까지 담당하는 대신에 20년간 입간판을 세울 수 있는 광고권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다른 광고주를 물색하여 광고료를 받으면서 수익사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보다 좋은 위치에 많은 광고를 원하고 시에서는 규제를 원하기 때문에 갈등도 없지 않다고 했다. 사유지에 광고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때 행정비용을 내도록 하고 있었다. 또한 일정 크기 이하의 작은 간판의 경우는 허가 없이도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네 번째 행선지 - 파리 (3월11일 - 13일)
3월11일 오전 9시55분 베를린을 출발하여 11시40분 파리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나와 바로 점심을 먹고 2시에 파리 시청의 도시경관 담당 국장을 면담했다. 30년 넘도록 이 일만 해 왔다고 했다. 파리시는 1943년 간판에 관한 법률이 있었으나 벌칙은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1970년대까지는 먹고 사는 일에 바빠 간판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1979년 환경법에 간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이래 중앙정부 차원에서 원칙을 정하고 각 지방자치단체가 지방특수성에 따라 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여지를 두고 있다고 했다. 모든 간판은 공공시설 이용료로 일년에 한번씩 세금을 내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판 조명에 따라 세금의 정도가 다르다고 했다. 파리 시 지도를 간판규제 정도에 따라 노란색, 초록색, 빨간색으로 구획을 정해놓고 있었다. 노란색은 아주 규제가 심한 역사적인 건축물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고 빨간색은 상업지역으로 상대적으로 간판을 좀 달수 있도록 융통성이 허용되는 지역이라고 했다.
새로운 간판관련 법규에는 벌칙을 강화하여 만약 불법간판을 달았을 경우 철거명령을 내리고 15일 이내에 철거하지 않으면 한 간판 당 하루에 80 유로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것이다. 벌금을 안내면 형사처벌도 가능하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간판에 대한 규제는 건축과 거리경관이라는 차원에서 그 크기나 개수 및 색깔 등이 결정되었고, 이 모든 권한은 전적으로 담당 공무원에게 있었다. 공직사회의 투명성, 전문성 및 그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말해주는 좋은 대목이어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간판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면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규범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상식선에서 융통성을 가지고 규제를 하라는 것과 너무 기술적인 용어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2시간에 걸친 토론을 마치고 호텔에 짐을 풀었다. 오후 7시부터 파리 세계문화의 집이 주최하는 제9회 ‘상상의 축제’ 한지문화제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지문화제에는 사단법인 한지개발원이 한지로 만든 의상 패션쇼가 있었다. 한지 특유의 질감과 그림, 빛깔로 한복 및 파티복으로 변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리고 서양여성들에게 결코 빠지지 않는 우리 모델들의 당당한 체형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이 자리에서 주철기 주불 대사를 만날 수 있었다.
3월12일. 아침부터 파리 시내 주요 도로들을 - 샹젤리제 거리, 몽테뉴 거리 라 데팡스 등 -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비디오도 찍으면서 간판품평회를 계속했다. 어디를 돌아봐도 아름다운 건축물이 먼저 보이고, 그리고 아주 적절한 크기와 모양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 후 시간을 내어 루브르박물관을 1시간반 정도, 그리고 로댕미술관을 한 시간 정도 돌아보는 것으로 파리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박물관, 미술관 천국으로도 손색이 없는 파리를 겨우 온전한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을 보내다니.... 아쉬움이 남는 하루였다. 다음날인 13일 아침에 공항으로 나가 서울행 비행기에 오름으로써 7박9일의 간판문화시찰을 모두 마감하고 14일 오전8시반,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맺는 말
- 유럽의 경우 영구 보존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문화유적이 많은 만큼 간판이 설 자리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였다. 그리고 건축물 자체가 간판 달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우리의 경우 신축건물부터라도 보다 강력한 규제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유럽의 경우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있어, 길게는 몇 백년, 짧아도 몇 십년 씩 한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간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다. 우리의 경우는 사회이동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간판 의존도가 그만큼 높기도 하다.
- 유럽의 경우도 간판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시대를 지나 지금처럼 정비된 사실을 알았다. 한국의 경우도 이제 간판에 눈을 돌려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어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이와 관련하여 관계 법령을 제, 개정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실현가능한 간판정책을 펼쳐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우리가 돌아 본 4개 도시 - 로마, 암스테르담, 베를린, 파리 - 는 모두 각각의 간판관련 법제와 규정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크게 보면 유럽대륙이, 그리고 유럽의 사회문화가 만들어내는 공통성이 있어 보였다. 우리의 경제발전, 사회발달 정도 및 우리의 문화에 알맞은 간판문화를 개발해 내고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든다. 짧았지만 매우 유익한 시찰이었고, 동시에 매우 시의적절한 시찰이 아니었나 싶다.
- 이번 시찰은 철저히 일 위주로 짜여졌었기 때문에 세 명의 의원이 갔지만 현지 우리 대사와의 만찬은 모두 취소하여 관폐나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 그리고 방문국의 의원이나 장관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시청이나 구청의 간판 담당 실무자를 만나고 다니는 실무중심의 일정이었다. 수백개가 넘는 간판을 보고 사진을 찍었지만 막상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 볼 시간은 단 한번도 가지지 못했다.
-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출장이었기 때문에 소속 위원들과의 정보공유를 위해 사진전을 염두에 두고 출발했었다. 의원들이 개인적으로도 간판사진을 찍었지만 동행한 간판전문연구가인 김용배교수가 주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따라서 이를 잘 정리하여 3월 28, 29, 30일 3일간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비디오 및 사진전을 준비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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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7일 1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