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와이어)--사회경제적 변화와 한국의 남성문화-한국문화인류학회 발표 논문

함 한 희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
1. 머리말

이 글은 20세기 한국 남성의 생활세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아봄으로 해서 이들이 이루어온 문화적 특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본 연구를 위해서 19인의 남성들의 생애사를 대비하여 분석해 보았다. 연구의 대상이 된 이들은 한국 땅에서 20세기 초반에 태어나서 성장했으며,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시민으로 살아온 ‘보통’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보통사람이라고 함은 ‘평균인’이라는 개념보다는 ‘특별하지 않은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본인들이 주장하듯이 ‘내세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고, 경제적인 기준을 가지고 보면 하층민으로 분류될 사람들이 더 많다. 19인의 남성들이 살아온 생애 전반이 20세기 초부터 후까지 펼쳐져있다는 점에서 지난 한 세기 남성세계의 변화를 읽어보는 데 이들의 증언은 소중한 자료가 된다.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면 한국 사회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여왔다. 자본주의가 정착되고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민주정치의 기반도 닦여졌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기본 틀이 변화하면서 유교적 세계관을 기초로 한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형성된 남성중심의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다시 말해서 근대적인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고, 남녀의 역할과 그에 따른 규범 및 가치관 등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학자들이 여성과 남성의 역할과 지위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공시적·통시적인 접근을 통해서 한국의 가부장제 연구가 심화되었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구축한 유교적인 남성 중심의 문화를 통해서 양반사회의 성격이 규명되었으며, 현재의 남녀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는 사회문화구조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김은희 1993, 김진명 1993, 마르티나 도이힐러 2003(1992), 문옥표 외 2004, 조혜정 1988, 최홍기 외 2004)

이러한 연구에 힘입어서 본 발표에서는 두 가지 부분에 대한 보완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역사적 시간에 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방법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가까운 과거를 탐구하는 일의 중요성에서 출발한 것이고, 후자는 남성들의 경험적 실체에 접근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현재 사료로 남아서 쉽게 없어지지 않는 먼 역사시간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한데 비해서 가까이 지나가버린 과거를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박현수는 역사연구에서 원근법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은유를 사용하였다. (박현수 2005) 나아가서 가부장제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의 대상도 넓혀서 여성들의 경험을 듣는 일과 더불어서 가부장제의 주체인 남성의 구체적인 경험도 들을 필요도 있다고 보았다.

간추리면, 이 발표에서 다루는 시기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과거인 20세기이고, 연구의 대상과 방법은 19인의 남성들이 직접 들려주는 구술생애사를 통해서 얻어진 자료분석과 해석이다. 19인의 남성들의 생애사를 분석한 결과 이들의 생활세계가 집, 일, 그리고 국가라는 세 영역으로 모아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발표에서는 이 세 영역을 중심으로 남성들의 활동과 의식을 살피고자 한다. 여기에서 인용된 자료는 본인을 포함한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의 연구원들이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수집한 구술생애사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것이다. 19인의 간략한 생애대비 연보는 표 1을 참고로 한다.

2. 집과 남성
(1) 아들로 태어남
19명의 남성들이 태어난 시기는 일제시대였다.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은 1915년생이고, 가장 늦게 태어난 사람이 1938년생이다. 이들이 태어난 시점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큰 변화를 맞고 있던 때였다.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고 있었고, 나라를 잃고 식민통치 아래 놓여 있던 시대였다. 19인의 부모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생애 주기의 정점에 있던 분들이었다. 부모들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통적인 살림살이 속에서 그에 합당한 규범 및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당시 사회의 신사조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자 쪽으로 더 기운 이상철, 서관철, 박태수, 오석호의 부모들은 스스로 철도국 근무, 점원 그리고 교사 등의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또 이재왕, 최성식의 부모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찾기 위해서 과감하게 고향을 떠나 이주를 결심하기도 했다. 이들이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서 정착한 곳은 일본인들이 세운 현대식 시설을 갖춘 농장이었다.

19인의 출생지는 한반도의 북쪽인 평안남도에서부터 남쪽 해안 끝에 위치한 전라남도 진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부모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던 분들이었다. 농사의 규모는 소작인을 포함한 소농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소유지가 없거나 소작지를 구하기 힘들어서 농업노동을 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아버지가 중농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어서 다소 경제적인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란 이들도 있다.

가족 안에서 자녀가 태어난 순서도 이들의 인생을 좌우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장자인 경우는 부모·형제 그리고 친척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다. 19인의 아들들 가운데 외아들을 포함해서 맏아들이 10명이다. 10명의 맏아들 혹은 외아들들은, 월남한 이후 가족과 생이별을 한 최기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모를 봉양하고 형제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맡았고 그것을 해냈다. 이들에게는 맏아들로서 받은 권리나 혜택보다는 의무가 더 무거운 셈이었다. 한 예를 들어보면, 박태수의 아버지는 용산 철도국에 근무했으나 갑자기 강제 퇴직하게 되었고, 당시 17살의 박태수는 대가족을 부양하게 되었다. 13살에 철도국의 급사로 일을 시작한 이래 선반공, 운전기술 등을 배우면서 살림을 돕던 그는 아버지의 퇴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결혼조차 미루다가 35살에 늦장가를 들었다.

아버지가 병, 사망, 사고 등으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맏아들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다. 지위만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어머니와 함께 그 짐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이 시기까지도 장자우대라고 하는 규범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장자가 차지하는 지위나 상속의 몫은 명분에 불과했다. 상속받을 재산이 없고 가족부양의 책임은 있어서 장자들의 부담이 컸다. 이들은 효의 윤리로써 그 짐을 짊어진 셈이었다. 맏아들만이 아니라 차자가 그 책임을 맡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둘째아들은 김종호나 막내아들인 강기숙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들을 대신해서 집안의 가장노릇을 했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있어도 19인의 남성들 가운데 소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14명이다. 소학교를 대신해서 서당에 다닌 두 사람을 포함하면 16 명이 신구교육을 받았다. 이 당시 부모들은 아들이 신교육을 받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나 집안의 사정이 허락지 않을 때는 마을 안 서당이나 인근의 사립학교 또는 간이학교 등을 다니도록 하였다. 소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김재식, 강기숙은 소학교를 중퇴하고 농사일을 해야 했고, 이재왕도 소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이 이사하면서 학교가 멀어서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그는 새로 이사한 마을 안에 있는 간이학교를 다니면서 못다 한 학업을 보충하였다. 또 소학교를 졸업하고도 서당교육의 필요성을 느껴서 뒤늦게 농한기를 이용해서 서당을 다닌 최성식 같은 경우도 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나 농업학교 등 상급학교로 진학한 사람들은 모두 4명이었다. 4명 가운데 3명은 농업학교를 졸업했고, 가장 나이가 어린 김동호(1936년생)는 일반중학교를 다녔다. 1920년대에 출생한 이들이 당시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부유해서라기 보다는 부모들의 학구열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농업학교 출신인 오석호의 아버지는 교사였고, 서관철의 아버지는 당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 월남인 3인 가운데 나이가 많은 최기성 (1919)과 서관철(1921)이 모두 농업학교 출신이고, 선봉구 (1933)도 서당과 보통학교 두 곳 모두를 다녔다. 이북 출신의 월남인들의 학력이 높다는 점에 주목이 간다.

(2) 남편, 아버지 되기
19인의 남성이 결혼을 하게 된 나이는 평균 20대 초반이다. 10대에 결혼한 사람이 5명이다. 강기숙(1919)과 장재길(1933)이 혼인한 나이는 16살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각각 18살과 19살이었다. 강기숙과 장재길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을 도와서 농사를 지었고, 그래서 어른들이 일찍 성혼을 주선하였다. 또 18살에 혼인하게 된 서관철도 농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약혼을 하고 그 다음 해 결혼하였다. 이 당시 부모들이 전통 혼례법에 따라서 조혼을 시킬 경우, 아들이 어느 정도는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하다고 판단해서였다. 가장 늦게 결혼한 사람은 박태수인데, 집안이 어려워서 결혼을 미루다가 35살이 되어서야 혼인하였다. 이처럼 가난한 집안에서는 아들의 혼사가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 김종호도 날품팔이, 행상 등 일로 생활하다가 29살에 결혼하게 되었다. 재혼을 한 사람은 모두 4명인데, 2명은 이북에서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두었으나 혼자서 월남한 후 가족과의 재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재혼하였다. 한 사람은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부모와 부인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부모의 권유로 이혼하게 되었다. 이 시대 남성들의 결혼, 재혼은 개인의 자유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집안 어른들의 판단이나 불가피한 사회적인 상황 아래서 진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19인의 남성들이 한 가정을 이루면서 곧 아버지가 되었다. 1940년 이후 자녀들이 태어났고, 다산을 선호하였다. 대부분 5명이상의 자녀들을 가졌다. ‘어린 아이들은 제 먹을 복을 타고 난다’는 말에 근거해서 자녀가 많은 것을 복으로 여겼다. 비교적 자녀를 적게 낳은 사람은 이동식으로 아들 셋을 낳아 길렀다. 남아를 선호하는 풍속이 있었지만, 이동식을 제외하고는 아들과 딸이 비교적 고르게 태어났다. 딸을 가장 많이 낳은 사람은 최성식으로 2남 6녀를 두었다.

3. 일과 남성
(1) 조숙성
현재 나이 70, 80대을 넘긴 이들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이는 13, 14살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린 나이에 생업활동을 시작하였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농사를 돕기 시작해서 보통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성인의 몫으로 일을 해야 했다. 19인의 남성이 언제, 어떤 일을 하기 시작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보았다. 한 부류는 고향에 남아서 농사일을 지속한 경우이고, 다른 부류는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은 경우이다. 김동석은 13살 어린 나이에 혼자서 고향 진도를 떠나서 목포로 왔고, 곧 뱃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기관장, 선장을 거치면서 생의 대부분을 배위에서 보냈다. 김동석 처럼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무조건 일을 시작한 경우가 많다. 배병덕도 농사일을 하다가 일거리를 찾아서 일본농장으로 갔다. 일본인 농장감독의 집의 사동으로 들어가서 3년 동안 일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일본어를 익힐 수 있어서 독립한 후 농장에서의 생활이 비교적 수월하였다. 농업관련 일본서적을 읽고 비닐하우스 같은 새로운 농사법을 창안하는 등 농사에 관해서는 남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철도국, 농사시험소, 조선소, 제철소와 같은 신흥 산업과 관련된 곳의 급사, 견습공 등으로 취직하였다. 농업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보다 전문직을 구하여 취직했다. 오석호의 경우는 대학 진학을 꿈꾸었으나 못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농업학교 졸업과 동시에 수리조합에 취직이 되었다.

(2) 즉시성 또는 저돌성
이들은 결혼을 한 이후에는 가족에 대한 생계부담이 더 커지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찾아 나섰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했지만, 충분한 토지가 없어서 가난한 생활을 벗기 힘든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했다. 김종호, 김동민은 도시로 나와서 날품팔이라고 부르는 노동을 시작하였다. 생계를 위해서는 손에 닿는 대로 일을 했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일거리가 있는 곳은 어디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행상을 하기도 하고, 공장에 들어갈 기회가 생기면 일용직 잡부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종호는 가난했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릴 때부터 12년 동안 농업노동자로 전전했다. 그 후 군대를 다녀와서는 대구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약 10년 동안 생선 행상을 했다. 그 당시 부인도 노점상을 해서 그 일을 돕기도 했다. 건축공사장의 철근공으로 4년 동안 일하다가 다시 리어카를 끌면서 노점상을 했다. 그 후 시골로 가서 4년여 농사를 지었다. 다시 대구로 나와서 공장에서 잡일을 했고, 마지막으로는 공장의 주야간 경비직을 끝으로 50년 생업활동에서 은퇴하였다. 군산의 김동민도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전남 화순에서 농사를 짓다가 5년 여의 군대생활을 했고, 전입 후에는 농사를 짓다가 군산으로 이주했다. 군산 부두의 노동자가 되기도 했고 청과시장의 잡역부가 되기도 했다. 사정이 허락하면 행상도 하다가 은퇴하기 2년 전에는 고무공장의 일용직으로 취직을 했다. 그도 1995년에 생업활동을 마감하고 지금은 작은 텃밭을 일구면서 소일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생활터전은 각각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 끝인 대구와 군산이지만, 두 살터울로 태어나서 인생유전의 경험이 매우 유사하다.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살림을 돕다가 부모 중 한분을 잃고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1950년 중반에 군대에 입대했고, 1960대 초반 비슷한 시기에 도시로 이주하면서 막일을 시작하였다. 부인들도 노점상, 행상 등 생업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유사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1995년 50년의 생업활동을 마감하였다.

(3) 다변화
위에서 예를 든 두 사람의 경우, 일을 기준으로 이들의 직업별 구분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여년의 농사일, 10여년의 장사일, 10여년의 노동일을 한 사람들을 농부로 보아야 하는지, 장사꾼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막노동자로 보아야 하는 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농민으로 보이는 김제의 강기숙의 경우도 어떤 직업군에 넣어야 할지 어려울 때가 있다. 오랫동안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농사를 지었지만, 가계의 수입으로 따지면 장사와 토탄캐기가 그의 주 수입원이었다. 강기숙은 오일장이 따라 다니면서 생선 등을 팔기도 하고 농촌을 다니면서 곡식과 일용품을 교환해 주는 장사도 하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 한 때 토탄을 캐서 많은 돈을 벌었으나 형님의 노름빚을 갚고 조카들을 키워서 집안의 기틀을 세웠다. 그가 짓는 농사는 자급자족을 위한 것이었고, 197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농사가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는 수입원이 되었다.

한국사회가 불안정했던 시기인 1940년에서 1970년대까지 한국남성들의 직업을 노동자, 상인, 농민 등의 집단으로 분류해서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서 특유의 즉시성과 저돌성을 발휘하면서 다변화된 생업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4) 이동성
19인의 생업활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이들이 한결같이 일을 찾아서 부단히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사람에 따라서 양적인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예외가 없이 일을 찾아서 이동을 했다. 그 이동경로를 간략하게 표 1의 19인의 생애대비 연보에 표시해 두었다. 이동하는 첫 번 째 이유는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의 이유는 사회경제가 변하면서 새로운 직종 및 지역에 대한 꿈과 호기심도 영향을 주었다. 먼 도시나 만주 등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기도 했다. 부정기적으로 장기간 이동하는 경우도 있고, 정기적으로 계절적 이동 요인도 있다. 이들이 종사하는 일의 성격이 바뀌기도 하지만, 같은 직종이라도 일하는 장소가 자주 바뀌었다. 혼자서 이동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 모두 거주지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일단 정착이 이루어지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남성들은 혼자서 움직이는 일이 많았다. 가족들이 집에 남게 되면서 집안일은 부인의 책임 아래 두어진다. 이동이 잦은 남편들은 수입이 일정치 않을 때가 많고,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워서 부인들은 집안의 실제적인 가장으로 나서는 일이 적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경우는 특히 남편이 집을 떠나면 농사일 전부를 부인이 도맡아서 해야 했다.

4. 국가와 남성

국가는 청년이었던 이들이 전쟁준비, 치안담당, 전투, 전쟁 복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부름에 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하기도 했다. 특히 일제시대 징용은 젊은이들이 가장 꺼리는 국가의 강제적 조치였다. 유제동은 1945년 1월 나가사키의 한 공장으로 끌려가서 노역을 하였다. 김제의 강기숙은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 생활근거지를 옮겨 다녔고, 최성식은 징용대상 명단에 올랐다가 징발 직전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김제의 일본농장 안은 무질서와 혼돈의 조짐이 보였다.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자치대가 구성되었고 이 자치대에 배병덕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이었던 그는 만인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같은 마을 안에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이재왕과 같은 청년들도 있었다. 정치이념이 달라지면서 이들 사이의 갈등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지역사회가 심하게 균열되기 시작할 때였다. 배병덕은 공산당에 입당해서 면당위원장에 오르고 경찰서습격사건을 모의하였다. 모의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취재 도중에 심한 고문을 받고 큰 부상을 당했다. 그는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불구로서 평생 그 후유증으로 시달렸다.

한국전쟁기에 청년들이었던 이들은 국가의 부름에 나섰고, 생명을 내놓고 전투에 참여했다. 20살 청년이던 서울의 박태수는 최전방 유격대로 철의 삼각지, 금화전투, 백암산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한탄강 도하 작전 중에 다리에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한 그는 1953년 휴전 후 제대를 하였다. 김제의 이재왕은 당시 29살 (호적에는 1921년이나 실제로는 1919년생)로 나이가 많았으나 뒤늦게 피난 길 부산에서 미군7사단 보충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잠시 훈련을 받고, 인천상륙작전에 가담하여 오산리 전투를 필두로 북진하여 함경북도까지 밀고 올라갔다. 인천의 배목수 이상철은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어 부산에서 근무하였다. 성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20세 청년 장재길은 휴전 이후에도 지리산, 내장산, 장성, 정읍 등지에서 공비토벌대로 참전하여 4년여 동안 복무한 후 제대하였다. 이 청년들 가운데는 징집을 피하고자 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는 군대에 입대해서 5년여 군복무를 한 경우도 있고, 끝내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도 있다.

군복무 기간 동안 가정은 부인이 돌볼 수 밖에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1년 미만으로 짧은 기간 군대를 갔다 온 사람도 있고, 4년-5년 동안 군생활을 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생업활동에서부터 자녀양육 그리고 시부모 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안팍의 일은 부인이 책임을 져야 했다.

5. 맺는말

이 글에서는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19인의 남성들의 활동을 세 영역으로 국한시켜서 살펴보았다. 그 세 영역인 집, 일 그리고 국가와 19인의 남성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분석하여 이들이 주체적으로 일구어온 문화적 내용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추리면서 20세기 남성문화의 한 단면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한다. 첫째로는 장자우대 또는 아들선호의 신화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권리나 혜택 보다는 책임이 더 무거웠다. 이들은 스스로 효의 규범을 앞세워서 그 책임의 무게를 덜어내고자 했다. 둘째로는 이들이 아들이기에 딸들보다는 신교육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직업을 갖기도 했다. 셋째로는 조혼을 하기도 했고, 평균 혼인연령은 20대 초반이었다. 다산을 통한 대가족 구성이 이들의 이상적인 가정이었다. 넷째로는 이들은 어린나이에 생업활동을 시작했고, 심지어는 13,4세에 혼자서 일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다섯째는 이들은 한결같이 생계활동을 위해서 부단히 이동을 했다. 그러다보니, 일이 지속되기보다는 임시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특유의 저돌성을 발휘해서 손에 닿는 대로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왔다. 한 사람의 생계전략이 그 과정에서 다변화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여섯째 국가는 전쟁과 혼란기에 청년들이었던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해왔다. 개인과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 국가는 전쟁을 치루고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고, 이들 스스로는 애국과 충성에 대한 자부심이 연령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한다. 일곱째는 일과 국가에 대한 의무가 19인의 남성의 이동성을 부추기고, 이들이 가족들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이들의 부인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고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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