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송은 9월 11일 밤 10시, 재방송은 9월 12일 오후 2시, 9월 14일 오후 8시, 9월 15일 새벽 4시와 낮 12시, 9월 18일 오전 10시.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조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한동안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그는 내친 김에 유일하게 복종을 거부하고 있던 일본을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병사 14만 명을 4천 4백척의 배에 태워 대함대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1281년 8월, 단 하룻밤 만에 그 많은 배와 병사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일은 사상 최대의 해상 실종 사건이었으며, 세계의 판도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 함대의 실종은 무수한 추측만 낳을 뿐 700여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한 일본 어민이 몽골 문자가 새겨진 무거운 청동 물체를 발견했다. ‘규슈 오키나와 해양 고고학회’의 잠수 전문가 겐조 하야시다가 이끄는 해양 고고학자 팀은 ‘밴쿠버 해양 박물관’의 제임스 델가도와 함께 그 어선의 좌표를 추적한다. 청동 물체가 발견된 곳은 일본 해안에서 불과 3.2km 떨어져 있는 이마리 만이었다. 그곳에서 1281년에 사라졌던 거대한 몽골 전함 난파선이 발견되고, 군 역사상 최대 비극의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하야시다 팀은 쿠빌라이 칸 함대가 맞았던 최후 순간의 증거를 찾아 바다 밑을 탐색한다. 함대의 모습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비극이 일어난 그날 밤의 상황이 서서히 드러난다. 강철 검과 투구, 사람의 시신, 터지지 않은 흙탄, 그리고 10개의 큰 닻이 발견된다. 닻에서 채취한 꽃가루 샘플 분석 결과, 하야시다의 예상대로 그 배는 중국 조선업의 황금기였던 13세기 몽골 제국의 것으로 밝혀졌다. 흥미롭게도, 닻들의 위치로 볼 때 침몰 당시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새로운 증거를 확보한 하야시다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폭풍 전문가 줄리안 헤밍에게 함대가 전멸한 원인들을 조사해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일본 전설에 의하면 ‘신의 힘’, 즉 ‘가미카제’가 침략 함대를 전멸시켰다고 하는데, 헤밍의 조사 결과 초강력 폭풍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된 몇 가지 보기 드문 유물들은 그날 밤 침몰한 원인이 태풍만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쿠빌라이 칸 함대가 침몰한 것은 정말 자연 재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실수 혹은 어떤 비겁한 행동 때문이었을까? 쿠빌라이 칸 함대의 침몰로 몽골 정부는 파산하여 결국 몽골 대제국은 멸망한다. 과연 함대의 침몰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쿠빌라이 칸 왕조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콜롬비아 대학의 모리스 로사비 교수 (‘쿠빌라이 칸: 그의 인생과 시대’ 저자)와 위스콘신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데이비드 모간 박사 (‘몽골 제국과 그 유산’ 저자)가 지적하듯이, 쿠빌라이 칸은 많은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 그는 지금의 베이징인 타투와 당시 새 수도였던 제나두라고도 알려진 상투 등 2개의 신도시를 건설했고, 그랜드 운하를 완공했으며, 새로운 미술관과 연극, 예술운동을 대중들에게 보급시켜 몽골 제국을 세계 문화의 선봉에 서게 하였다. 그리고 전 세계를 강타한 위대한 발명품인 지폐를 만들기도 했다.
위대한 황제 징기스칸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은 유라시아 두 대륙을 거침없이 휩쓸고 다니며 광활한 몽골 제국을 건설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 지도자로 칭송 받는 그이지만 전장터 밖에서도 세계적인 업적을 이룩하였다.
정복한 땅의 면적 면에서 징기스칸은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로 평가 받아왔다. 사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왕국보다 4배가 더 컸다. 이렇듯 정복한 땅이 광활하다 보니 문화적으로 많은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과 러시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정부 차원에서는, 자신이 통치하는 전 지역에서 기존의 귀족주의를 타파하고 능력주의를 정착시켰다. 통신과 관련해서는 광범위한 지역에 우체국망을 조직하고 알파벳을 보급시켰다. 그밖에 그는 고문을 법으로 금지시켰고 교사와 의사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확립했다. 또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주판과 나침반을 유입시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렇듯 위대한 업적과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시작은 수수하고 보잘 것 없었다
그는 1162년 몽골 중부 케룰렌 강 어귀에서 하급장군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테무진이었다. 9살 때 원수 집안에게 아버지를 잃고, 가족들은 부족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 해 혹독한 겨울에서는 간신히 살아 남았지만, 또 다른 부족이 습격해 그를 잡아감으로써 가족들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졌다. 테무진은 가까스로 도망쳐 가족에게 돌아갔고, 10대 초반의 나이에 맹렬한 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20살이 채 안 됐을 때, 민주주의를 통해 여러 몽골 씨족과 부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 통합 노력은 아내 보르테가 납치됐을 때 빛을 발했는데, 통합 부족들의 도움 덕분에 아내가 구출될 수 있었다.
1206년 그는 체계적으로 모든 몽골 부족을 단일 연맹으로 통일시켰고, 우주의 왕을 뜻하는 ‘징키스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몽골 부족 통치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던 징기스칸은 정복 원정을 시작했다. 1209년 지금의 중국 북서부 지역과 티벳 일부에 해당하는 서하를 토벌하러 나섰다. 만리장성을 넘어야 했던 이 공격은 1210년 서하의 통치자가 징기스칸에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체계적인 공격을 통해 그는 중국 전 지역과 현재의 한반도까지 군대를 파견했다.
1219년 특사들이 대거 살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징기스칸은 군의 진격 방향을 서쪽으로 돌린다. 그는 터키 족을 공격하여, 곧바로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 터키 서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 후 지금의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지역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남과 서로 정복을 끝낸 그는 1222년 러시아를 침략하여 페르시아 만부터 북극해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였다.
제국의 크기가 증명해주듯이, 징기스칸은 조직과 전략의 천재였고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효율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부대를 10의 지수 승으로 조직했고 적의 군사력과 위치를 염탐하는 첩보원과 정찰병을 활용했으며 과감한 기습 공격을 시행하여 최초의 전격전을 보여 주었다. 전장에서는 무자비했지만 패한 국가의 생존자들에게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자치정부 수립을 허용했고, 충분한 음식과 안전을 보장해 주었으며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였다.
1226년 서하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징기스칸은 말이 놀라는 바람에 낙마를 하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결국 그 부상이 깊어져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서하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징기스칸이 죽은 뒤에도 서하의 수도 봉쇄를 계속했다. 서하 공격이 끝났을 때 징기스칸은 비밀 장소에 안장됐는데, 그 위치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씨앤앰 개요
수도권 최대 MSO인 (주)씨앤앰은 15개 케이블TV방송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광대역 HFC망을 기반으로 100메가급 초고속인터넷서비스와 유해차단, 원격PC관리 등 부가서비스, HD디지털방송과 VOD,게임포털,TV전화 등을 포함한 다양한 양방향서비스, 통화비가 저렴한 인터넷전화서비스(VoIP) 등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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